엄마도 함께 읽어볼까
나는 스스로 세련된 엄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독서에 관해서는.
빨래통에 양말 갖다 놓으라는 잔소리는 백번 해도 아이들에게 책 좀 읽으라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 책장에 전집을 사서 빽빽이 꽂아놓는 일도 하지 않았다. 똥과 방귀가 책에 튀어나오기만 하면 배꼽을 잡고 웃는 아이에게 비슷한 책을 도서관에서 자주 빌려다 주었다. 양치할 시간이라고 말하려다가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큼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기다렸다.
그 책이 나타나기 전까진.
커다란 동그라미 안경을 쓰고 이마까지 내려오는 앞머리를 가진 귀여운 여학생과 반듯한 더벅머리에 약간 통통한 모습이 장난꾸러기 같은 남학생이 표지를 장식하는 책. 출간되면 바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인기도서. 학교에 신간을 들고 가면 친구들이 모여드는 책.
바로 『흔한 남매』 시리즈다.
앞 페이지를 펼쳐보니 오빠 으뜸이는 투블럭 머리 스타일에 배 나온 중학교 3학년이다. 독특한 요리하기, 동생의 장난을 받아치는 걸 좋아한다. 여동생 에이미는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다. 취미는 오빠 미행하기, 특기는 엄마에게 오빠 이르기다.
이 책이 우리 집 책장에 들어오는 순간, 다른 책들은 뒷전으로 밀린다.
책이든 유튜브 방송이든 아이들은 흔한 남매를 보면 킥킥거리고 웃느라 정신이 없다. 도서관에서도 『흔한 남매』 시리즈는 항상 대출 중이라 반납도서책장에서 발견한다면 행운이다.
어떤 책을 보든 말려본 적은 없었지만 아이의 독서 비중이 점점 만화책으로, 그것도 유튜브 채널에서 인기 있는 책들 쪽으로 향하니 살짝 신경이 쓰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서점에 함께 가면 장난감 코너를 피해 다녔지만 이젠 인기만화 코너 쪽을 피해 돌아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 나는 『흔한 남매』 책을 거실 회전책장에서 아이 방 책장으로 옮겨놓았다. 거실 전면책장에는 이제 막 도서관에서 빌려온 따끈따끈한 책들을 전시해 두었다. 눈앞에 안 보이면 『흔한 남매』의 존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킥킥거렸다.
“엄마, 『흔한 남매』 어디 있어?”
“몰라. 책장 어딘가 있겠지. 안 보이면 다른 책 읽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내가 빌려온 책들은 본체만체하고, 『흔한 남매』를 찾았다. 나는 열심히 찾는 척하며 할 수 없이 옮겨놓은 책을 꺼내왔다. 아이는 빈백에 앉아 킥킥대며 책을 읽었다.
다음 날, 나는 『흔한 남매』 책들을 팬트리로 가져갔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꽂아두었다. 그것도 거꾸로. ‘오케이. 이제 안 보이겠지.’
나의 순진한 생각과 계략은 얼마 가지 못했다. 팬트리에 넣어둔 책을 아이는 금세 찾아냈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즐겨 읽던 시절, 나는 좋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구별할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림이 예쁜 책, 공룡이나 토끼처럼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물이 나오는 책을 고르면 됐다.
아이가 읽기 독립을 하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그저 어떤 책이든 좋았던 나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나름의 기준으로 도움이 되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분류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거 보고 있을 거면 어서 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독서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엄마의 품위를 점점 유지하지 어려워졌다.
같은 시각 아이가 『과학동아』를 읽고 있었다면 나는 잘 시간이 지났어도 말리지 않았을 거다.
사실 나는 내가 지정한 ‘쓸데없는 책’들을 읽어보지 않았다.
문득 나는 아이들에게 왜 『흔한 남매』가 그토록 인기가 많은지 궁금해졌다. 에피소드 하나만 읽어봐야지 하고 책을 펼쳤다. 눈을 크게 뜨고 나는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을 태세였다.
둘은 자주 서로를 놀리고 다투기도 하는 현실남매였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안 그래도 매일 남매의 난을 벌이는 우리 집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할까 봐 걱정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어 아침에 서로 늦게 씻으려는 남매의 속고 속이는 아침 시간,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슬라임 가지고 놀다가 엄마에게 들켜서 뺏기는 일상, 서로 심부름을 하기 싫어 작전을 짜는 남매의 모습이 발랄했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일상들이 유쾌하고 코믹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엄마는 아이가 나쁜 말을 썼는데 『흔한 남매』에서 배운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럴거라고 넘겨짚었지만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서로를 놀리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에이미는 밸런타인 데이날, 오빠를 미행하다 사실 오빠가 초콜릿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몰래 오빠 가방에 초콜릿을 넣어놓는 여동생이기도 하다. 몇 페이지만 읽으려고 했는데 난 벌써 절반이 넘게 읽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방귀를 뀌고 동생에게 덮어씌운 후, 복수혈전을 벌이는 남매가 다음에는 어떤 일을 벌이나 궁금해서였다.
아이들에게 『흔한 남매』가 왜 재미있는지 물으면 그냥 웃겨서라고 한다.
내가 읽어도 웃겼다. 배우거나 생각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집어들 수 있는 책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휴식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흔한 남매 엄마가 조금 읽어봤는데 남매끼리 서로 맨날 골려 먹던데. 그게 재밌어?”
“엄청 재밌지. 현실에선 그렇게 못하잖아. 우리가 책에서처럼 서로 놀리고 싸우면 엄마한테 혼날 거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있어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머로 무장한 책이 내가 생각하는 교양 있는 독서의 가치에서 빠진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책 속의 인물들이 내가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일을 해소해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걸.
사실 『흔한 남매』와 같은 만화를 읽는 일이 '독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오락에 가깝다고 본다. 그러나 그 또한 아이들 책 세계의 일부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책을 선택하는 일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나라고 매일 『논어』를 읽지 않는다. 어떤 날은 『베니스의 상인』을, 어떤 날은 『흔한 남매』를 읽는 날들이 쌓이다 보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책을 고르고 분별하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같은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은 검열관이 되기도 할 테다. 인기와 유머를 빌미로 어린이들에게 긍정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할 것이다.
며칠 전, 지인과 통화하다 나와 비슷한 엄마를 발견했다.
“우리 아들이 요즘 도서관에서 책 읽느라 집에 늦게 온댄다.”
“어머, 진짜? 책을 좋아하나 보네.”
“뭐 읽는 줄 아니? 사서 선생님이 그러는데 바로 『흔한 남매』시란다. 내가 못 살아.”
“크크크. 언니 내가 읽어봤는데 재밌어. 언니도 읽어봐. 근데 있잖아. 문득 어른을 위한 『흔한 부부』 책이 있다면 하고 상상해봤거든. 생각만 해도 너무 웃기지 않아?”
전화기 너머 들리는 그녀의 한숨 소리가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