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주말 오후, 우리 가족은 침대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다!”
아이들이 소리쳤다.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발사하며 건물벽을 타고 있었다. 아이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덟 살 아들은 슈퍼히어로에 관련된 아이템이라면 뭐든 사달라고 졸랐다. 스파이더맨, 헐크, 토르, 아이언맨이 등장하는 책을 진지하게 탐독했고, 코스튬과 무기들을 장착하고 만족스럽게 거울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슈퍼 히어로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토르에게는 마법의 힘을 가진 도끼가 있고, 아이언맨에게는 특별한 슈트가 있었으니까.
아이에게 의문의 영웅이 한 명 있었다.
“엄마, 어떻게 12척으로 130척을 물리쳤을까요?”
거미가 준 특별한 감각도, 마법의 힘도 가진 적 없는 그저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사실 나는 아이의 말을 흘려들었다. 별생각 없이 그저 도서관에서 이순신 위인전을 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아이는 물었다.
“엄마, 말이 안 돼요. 어떻게 12척으로 그 많은 적을 물리쳤을까요?”
“그러게. 이순신 장군이 워낙 훌륭한 장군이기도 하고 거북선도 도움이 됐겠지?”
“야, 그만 좀 물어봐. 너는 왜 똑같은 질문을 계속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몰라?”
옆에 있던 열 살 누나가 갑자기 이순신의 명언을 날리며 동생에게 핀잔을 줬다.
아이의 ‘어떻게’는 계속되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여느 남자아이들의 영웅인 이순신에 대한 예찬이려니 했다. 아이의 태도는 꽤 진지했다. 유튜브로 이순신에 대해 보여줄까 했지만 영상은 아이의 질문 회로를 차단할 것만 같았다. 이순신 영상이 끝나면 다음 예고편으로 광개토대왕이 나올지 모르고, 계속 클릭하다가 나는 그만 보라고 화를 내게 될지도 몰랐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만화책인 『Who? 한국사 이순신편』을 빌렸다.
아이는 책을 보자마자 씩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만화책을 읽어달라 할 때가 제일 무섭다. 동네 친구들과 전쟁놀이를 즐겨했던 이순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펼쳐졌다.
원님의 행차에도 진짜 전쟁이라 생각하고 임하는 중이니 돌아가 달라고 부탁한 어린 이순신의 당돌함 그리고 네 말이 옳다며 가마를 돌린 원님의 지혜로운 처사가 인상적이었다. 병조 판서며 좌수사며 모르는 단어들이 나오자 아이는 집중력을 잃기 시작했다.
항상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아이들 옆에 쌓아만 뒀던 내가 푹 빠져 읽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마 글로 된 위인전집에서 이순신을 읽었을 것이다.
만화책으로 된 위인전은 그림으로 인물의 상황이나 심기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고, 막힘없이 쭉쭉 읽혔다. 어른이 되어 읽는 위인전은 다르게 다가왔다. 판옥선과 거북선에 대한 지식도 새로웠다. 지식 만화책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중간에 교과서처럼 설명이 나오는 부분을 아이들이 읽지 않고 넘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재미있게 스토리를 읽다가 갑자기 신문이나 논문을 읽는 느낌이랄까.
“여기 나왔다! 12척 배로 130척을 물리친 이야기!”
블록 놀이를 하러 갔던 아이가 달려왔다.
다섯 장에 걸쳐 명량해전에 대해 나와 있었다. 그림을 보며 열심히 설명해 줘도 아이의 표정은 석연치 않았다. 책을 다 읽고도 뭔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울돌목의 거센 물결과 거북선의 힘을 빌렸다 해도 엄마는 이순신의 승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문득 아이가 책 속에 언급된 ‘난중일기’가 무엇인지 물었던 기억이 났다.
온라인 서점에서 『난중일기』를 주문했다. 아이들 수준에 맞추어 설명과 곁들여 이순신 장군의 일기를 편집한 책이었다. 그림보다 글이 많은 책이라 아이들 스스로 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 침대 아래 캠핑매트를 깔고 누웠다. 작은 스탠드를 켜고 비장하게 첫 번째 일기를 읽었다.
맑음.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각 고을의 벼슬아치들과 아전들이 인사를 하러 왔다. 방답의 관리들이 배를 수리하지 않아서 곤장을 쳤다.
- 임진년 1월 16일
“곤장을 80대나 쳤다고요?”
이순신이 병사를 때렸다 하니 아이들은 깜짝 놀라 잠이 달아난 듯했다.
그는 군사들이 전쟁 준비를 꼼꼼히 하지 않거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 크게 혼냈다고 쓰여 있었다. 직접 적은 일기라 그의 근심과 전쟁 상황이 더 실감 났다. 대포와 화살이 비 오듯 오가며 적과 대치한 상황을 읽을 때면 우리도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배에 있는 듯 숨죽여 긴장한 채로 읽었다. 이순신이 장군에서 죄인으로, 일반 병사 처지가 된 부분을 읽자 아이들은 도대체 당시 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부하 군사를 잃고 마음 아파하던 날,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해 술자리를 열던 날, 동료 장군 원균과의 갈등으로 화가 가득했던 날, 병사들이 추위에 떠는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던 날, 왜군의 칼에 맞아 죽은 막내아들을 잃은 고통스러워하던 날, 전염병과 감기로 끙끙 앓던 날들...
아이가 계속 질문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순신을 백전백승 영웅으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난중일기』를 내 손으로 골라 읽지도 않았을 거다. 뼈저리게 아프고 애통했던 그의 나날들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3주간 우리는 매일 밤 이순신의 일기를 읽다가 잠들었다.
“내 생각에 이순신은 준비를 철저히 해서 항상 전쟁을 이긴 거 같아. 날씨도 매일 살피고, 바다의 밀물 썰물도 잘 이용하고.”
“엄마, 이순신 장군은 용기가 컸던 거 같아. 일본이 배도 더 많고 힘이 셌을 텐데 도망가지 않고 싸웠잖아. 싸움의 신이 누구게. 바로 이순신 크크.”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장군의 좋은 점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이순신처럼 너도 내일 학교 가방에 준비물을 단단히 준비하라고 말할뻔했다. 위인전을 읽고 하지 말아야 할 부모의 행동 같아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난중일기』를 읽었다고 한산도 대첩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유재란이 어떤 전쟁이었는지 아이들이 정확하게 기억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식이 아니라면 왜 역사책을 읽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막히는 말문을 나는 『어린이를 위한 역사의 쓸모』라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찾았다.
‘많이 배우지 맙시다!’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에게 너무 열심히 배우지 말고 나는 누구인지 자주, 많이 생각해 보자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결국 지나간 사람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채워 나가는 것이니 역사를 그런 쓸모로 써보자고 말이다.
무기 끝을 날카롭게 다듬고, 꼼꼼하게 주변을 조사하고, 글을 썼던 그의 삶이 나에게도 깊이 다가왔다. 전쟁의 결과로만은 볼 수 없는, 서사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한 사람의 삶과 역사 속 장면들이 그의 글을 통해 드러났다.『난중일기』를 읽고 나야말로 이순신 장군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한 사람만 길목을 잘 지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몸과 마음의 정신력이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올랐다. 그제서야 아이가 붙들고 있던 '어떻게'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나도 아이처럼 마음에 질문을 품게 되었다.
‘어떻게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글을 썼을까. 나는 전쟁 중이 아니라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게 힘든데. 일기 쓰는 일이 그의 마음에 힘이 됐을까.’
아이는 『난중일기』를 읽은 후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스파이더맨처럼 초능력이 없었는데도 힘차게 맞서 싸웠던 비결이 용기라는 결론을 내린 걸까.
대신 다른 영웅이 나타났다.
“엄마, 안중근은 장군도 아닌데 어떻게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았을까요? 떨리지 않았을까요?”
그러게 말이다.
영웅이 참으로 많다.
▣ 참고도서
이진이 지음, 『난중일기』, 책과 함께 어린이
글 이수겸, 그림 스튜디오 청비, 『Who? 한국사 이순신』, 다산 어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