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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Apr 17. 2024

아직 독립 중입니다

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나는 독립 만세를 외칠 뻔했다. 

아이가 소파에 기대어 혼자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말이다. 아이가 여덟 살쯤 되자 나에게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다. 아이는 글이 많지 않은 동화책이나 만화책 정도는 혼자 읽을 수 있었다. 물론 귀여운 캐릭터가 주인공이면서 글자 크기는 큰 편이고, 중간중간 한 페이지가 그림으로 가득 찬 『고양이 해결사 깜냥』 같은 책이어야 했다. 


한글을 뗐다고 읽기 독립이 바로 성사되는 건 아니었다. 

소리 내어 한글을 읽을 줄 알아도 아이가 내용을 이해하면서 읽는 데까지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림책 읽기는 졸업했다는 듯한 누나 포스의 허세는 뒤에서 내가 감당해야 했다. 


만화책을 가져와 읽어달라 할 때가 제일 무서웠다. 말풍선으로 가득 찬 만화책은 한두 페이지만 읽어도 목이 타면서 나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쓸데없는 대사다 싶어 은근슬쩍 한 장면 뛰어넘으면 아이는 귀신같이 알아냈다. 엄마는 지식에 해당하는 부분을 열심히 읽으려 꼼수를 부렸지만 아이는 유머코드를 찾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림책은 함께 읽어주고, 한글을 뗀 후엔 추천 도서를 열심히 나르다 보면 읽기 독립이 절로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한글을 읽을 줄 알지만 읽으면서 바로 이해하긴 힘들고 읽긴 읽고 싶은 마음. 나도 그 마음을 안다.


독서모임에서 정한 책을 기한에 맞춰 읽어야 할 때, 가끔 나는 그야말로 눈만 굴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특히 니체의 사상을 이해해야 할 때, 고등학교 이후로 멀리했던 과학 이야기가 나올 때 더욱 그렇다. 마치 영어단어를 읽을 줄은 아는데 그 뜻을 모르는 상태로 낭독하는 듯한 느낌. 독서모임에 가서 다시 읽어보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제야 이해될 때가 많았다. 


논어에세이를 쓴 김영민 교수는 텍스트를 정밀하게 독해하려면 좀 더 섬세하게 읽을 수 있는 감수성을 열고 단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도 아직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독립을 하지 못했다. 좋은 책을 고르고, 공들여 읽어내고, 텍스트 뒤에 숨은 작가의 메시지를 읽어내기까지. 독서모임 없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친정 엄마가 집에 오신 날이었다.  

엄마는 돋보기안경을 낀 채로 신문을 보고 계셨고, 아이는 할머니 옆에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다. 


“아, 재밌다. 한미(외할머니)! 이제 같이 놀까?”

“어떤 책인데 그렇게 재미나게 읽었어?”

“『집 없는 아이』. 슬프기도 해. 한미도 한 번 읽어봐!”


드라마가 끝난 후 내가 좋아하는 장면, 배우에 대해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데 같은 드라마를 본 사람을 찾아야 하는 심정. 그런 감흥을 나누고픈 마음을 나도 안다. 꼬맹이의 재촉에 할머니는 읽던 신문을 덮고, 돋보기안경을 한 번 더 올려 쓰고는 책을 펼쳤다. 그러고는 앉은자리에서 책을 다 읽었다.


“이야, 이 책 정말 재밌네. 예은이는 어떤 인물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

“음. 나는 주인공이 너무 불쌍했어. 고아원에 있는 것도 그렇고, 엄마아빠도 없이 가는 곳마다 무섭고 힘들었을 것 같아.”

“한미는 주인공의 친구가 참 인상적이더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면 힘이 날 거 같아. 예은이는 그런 친구가 있어?”


그리 길진 않았지만 할머니와 손녀는 책 속 인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딸, 너도 이 책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

“나?”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에게 갑자기 화살이 돌아왔다. 나는 알겠다고 얼버무렸다. 

‘씻기고, 밥하고, 간식 챙기기도 바쁜데 언제 내가 애들 책까지 읽겠어.’ 

내 침대 협탁에는 주식 관련 책들이 쌓여 있었다. 엄마는 아이와 같은 책을 읽어보니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게다가 동화가 꽤 재미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그때 나는 엄마의 말을 흘려들었다. 




어느 날, 아이가 학교에서 책을 한 권 가져왔다. 

필수도서라고 했다. 독서록을 쓰려고 빌려왔나 했는데 아이가 나에게 책을 건넸다. 발랄한 목소리로 엄마도 읽어보라고 했지만 나는 보았다. 나를 향한 음흉한 미소를. 제목을 보니 이해가 됐다.


『잔소리 없는 날』. 

얇고 작은 책이었다. 책을 펼치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잔소리를 많이 하나 살짝 찔렸다. 주말 드라마의 내용이 대충 예상되듯 제목만 봐도 훤히 내용이 보였다. 책 표지엔 마치 남자 빨강머리 앤 같은 느낌의 소년이 책가방을 매고 날개를 단 듯 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책장에 책을 꽂았다.


며칠 뒤 아이가 물었다.

“엄마, 『잔소리 없는 날』 읽어봤어?”

잔소리하지 말라는 말보다 더 무서웠다. 책을 읽었는지 확인까지 할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오늘 읽어보겠다고 대답했다. 아이가 혼자 책을 읽은 후로는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뿐더러 같은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별로 하지 못했다. 


문득 책을 좋아했던 아빠와 ‘어린 나’가 떠올랐다.

테니스를 좋아하지만 같이 경기는 해 보지 않은 아빠와 딸처럼 우리는 서로가 어떤 책을 읽는지는 잘 몰랐다. 아빠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았을까. 아빠가 읽는 사람으로 쌓았던 그만의 감수성에 대해, 쌓아놓고 읽었던 역사책에 대해 이야기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걸을 줄 안다고, 벌떡 일어선다고 독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잘 일어설 수 있는 길에는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읽는 일도 그랬다. 학원을 하나 줄이고 책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일, 아이들의 관심과 수준에 맞는 책을 선택하는 일, 무슨 말인지 몰라도 부단히 읽어 보려는 노력, 함께 읽는 사람과의 교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빨리 설 수 있게 레드카펫을 깔아주는 일이 아니라 홀로 설 수 있는 길에 건강한 자극을 주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엄마를 향한 음흉한 미소 그리고 반강제로 시작한 동화책 읽기.      


한 번 읽어보라는 아이의 제안에 책을 펼쳐보는 마음. 그곳이 시작이었다. 

내 무릎이 더 이상 의자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아쉬움, 아빠와 나의 독서가 교차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 성장해 가는 아이의 책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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