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그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모습은 마냥 멋있어 보였다. 아이폰을 가지고 다니면 신인류가 된 것 같았고, 커피숍에서 애플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사람을 보면 실리콘 밸리에서 온 사람처럼 보였다. 스티브 잡스가 만든 혁명은 날로 새롭고 나에게 이로울 것만 같았다.
10년 후,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여느 날처럼 오후 4시는 아이가 유치원에서 하원하고, 나는 저녁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엄마, 나 이걸로 재밌는 거 볼래.”
돌아보니 아이는 테이블에 놓인 아이패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건 엄마가 일할 때 쓰는 거야. 여기에선 만화가 안 나오는데?”
“아니야. 유치원에서 이런 걸로 만화 본 적 있어. 헬로카봇 나올 거야.”
“헬로카봇은 주말에 TV로 보자. 간식 먹으면서 책 볼까? 엄마가 오늘 로봇 책 빌려 왔지. ”
아이를 달래 봤지만 그럴수록 점점 만화를 보여달라고 떼를 썼다. 슬슬 나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니 아이는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났다. 아이는 간식도 먹지 않았고, 내가 가져온 책에도 관심이 없었다. 왜 영상을 보면 안 되냐고 시위하는 듯했다.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해보자 싶었다. 30분이 지나자 갑자기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유난스럽게 군 건 아닌가. 아이도 종일 유치원에서 생활하고 집에 오면 편히 TV도 보고 싶을 텐데. 오늘만 보여줄까.’
아이가 계속 울자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될 수 있다. 유치원에 다녀와서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 습관이 될 것이 뻔하다. 나는 집안일을 편히 할 수 있을 테고, 아이는 영상 하나가 끝나면 다음 영상을 마음껏 클릭할 테니. 우리는 그 상황이 자연스럽고 편해질 것이다.
우리 집에서 TV는 주말에만 볼 수 있다는 게 나의 원칙이었다. 책이 아니라 다른 어떤 놀이를 하든 아이가 멍하게 영상에 노출되는 일만은 피했다.
어린 시절, ‘머털도사’와 ‘달려라 하니’를 볼 때는 정해진 시간에 TV 앞에 앉아야만 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할 때 볼 수 없었다. 만화를 보는 데 자제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패드 속 애니메이션 속에는 신나는 노래와 귀여운 캐릭터들, 눌러도 눌러도 끝나지 않는 스토리가 있었다. 유튜브에선 영어 영상에 꾸준히 노출시켜 꽤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도 속속 등장했다. 나는 영어와 자라나는 뇌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주말에는 TV 속으로 빠져들 것처럼 정신을 쏙 놓고 보지만 평일 아이들의 놀이에서 나는 결이 다른 즐거움을 알아차렸다.
놀이터는 수줍게 새로운 친구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 곳이었고, 그네 타는 차례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배우는 곳이자 얼음땡의 규칙을 의논하는 장이었다. 아이들은 핸드폰을 들고 있을 때보다 뛰어놀며 웃고 울 때가 참 예뻤다.
집에서 블록 놀이를 할 때는 천정만큼 쌓고 부수며 좌절하는 날이 허다했다. 작은 책, 자기 얼굴보다 커다란 책, 질감이 딱딱한 책, 글이 없는 그림책, 신데렐라의 궁전이 입체적으로 나타나는 팝업북을 만져보고 블록처럼 쌓아보는 날. 아이가 책 속의 세계가 다양하고 흥미롭다는 사실을 느낄 때까지 충분한 시간과 촘촘한 노력이 필요했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빈틈이 가득했지만 그 사이는 아이들 스스로 서서히 채워나갔다. 나는 넘쳐나는 유튜브 영상보다 가치 있는 일들이 많다는 믿음만 굳게 지키면 됐다.
아이가 진정된 후, 나는 다시 한번 약속을 되새겼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나는 같은 상황이 일어날까 봐 긴장하고 있었지만 아이는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았다.
그 후로도 태블릿과 휴대폰 속 영상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다. 식당에서 친구네 아이가 아기 의자에 앉아 뽀로로를 편안히 시청하고 있으면 우리 집 아이들도 힐끔힐끔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꼭 깨물며 끝까지 내 핸드폰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은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는 종종 나를 의심한다.
"친구들이 어제 학교에서 나눠준 태블릿으로 유튜브 보면 된다고 했거든. 근데 선생님이 오늘 그건 숙제 하거나 검색할 때만 써야 한대."
“엄마,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이 갑자기 휴대폰 사용 금지라던데. 쉬는 시간에 애들이 게임을 못한다고 투덜댔어. 엄마가 전화한 거 아니지?”
“아니? 엄마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다른 엄마가 전화했나. 아니면 원장님이 하신 말씀이겠지.”
나는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크크크. 엄마는 금지하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아이들을 위한 방향으로 휴대폰 사용규칙을 고려해 주시라고 제안한 것 뿐이야. 학교 선생님께 태블릿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는지 정확히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시면 좋겠다고 문자 보냈고 말이지.'
스티브 잡스만 원망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빌게이츠는 자녀들이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했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도 아이들이 아이패드를 좋아하겠다는 기자의 질문에 아이들은 사용해 본 적이 없다고 답했는데 말이다.
아이들이 독서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내가 노력한 일은 거실을 서재로 꾸민 게 아니다.
유명하고 값비싼 전집을 사다 나른 것도 아니다.
분별력과 자제력을 배워나가야 하는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쉽게 영상을 볼 수 있는 기기를 손에 쥐어 주지 않은 것뿐이다. 말처럼 단순하고 쉽지 않았다. 아이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서 영상이 나오는 기기를 제한하는 일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나만 마치 원시시대로 돌아가는 엄마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