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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Mar 27. 2024

오늘 밤은 딱 하나만이야

아이를 낳기 전엔 불을 끄고 토닥토닥하면 아기들이 새근새근 자는 줄 알았다. 

유튜브로 백색소음을 틀고, 흔들 기계가 되어 한참을 안아야 하는 줄 몰랐다. 심지어 내가 낳은 아이는 밤이 되면 천정을 뚫을 것처럼 큰 소리로 울어댔다. 나는 겨울 밤중에도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털모자를 씌우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밤공기를 쐬고 고개를 들어 깜깜한 밤하늘에 별이 보이면 그제야 조용해졌다.

 

다섯 살이 되어도 아이 스스로 자는 일은 없었다. 

아이는 매일 「사자와 생쥐」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세상에 없는 창작 이야기를 지어서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자다가도 이야기를 소리쳤다. 나에게는 무서운 잠꼬대였다. 이솝우화 이야기,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등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한 바퀴 돌리고 나니 이야깃거리가 고갈되기 시작했다. 


책장을 둘러보니 제목에 ‘이야기’가 들어간 책이 눈에 띄었다. 

『옛이야기 보따리』. 언제 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두꺼운 책의 포스에 눌려 책장에 고스란히 꽂혀있기만 했던 책이다. 책을 꺼내 들었다. 두 세장 분량의 짧은 이야기들이 100편 넘게 담겨 있었다. 중간쯤 펼쳐서 한 페이지만 읽어봤다. 술술 넘어가고 재미있어서 이야기 하나를 다 읽었다. 


‘아이에게도 밤에 들려줘 볼까.’ 


그중 이야기 하나를 골라 두 번 정도 읽었다. 

화려한 공주나 로봇을 좋아하는 요즘 아이들이 과연 옛날이야기를 좋아할까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세 가지 소원〉으로 골랐다. 


“엄마가 오늘은 옛날 이야기 해줄까?”

“좋아. 흥부놀부 이야기야?”

“음. 흥부놀부처럼 옛날이야기인데 한 번 들어봐.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살았대. 하루는 이 마을에 머리칼이 눈처럼 하얀 웬 할아버지가 찾아왔어. 부자를 찾아가 하룻밤 재워달라고 했지.”


내용을 기억하느라 잠깐 멈추면 아이는 다음은 어떻게 됐는지 빨리 들려달라고 성화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는 씩 웃었다.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엄마, 내일도 옛날이야기 하나 해줄 거지? 히히.”


그 후로 나와 남편은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를 들려줬는지 모른다. 이백 개쯤 될까. 아니, 더 될 것이다. 아이는 매일 앙코르를 외치며 이야기 하나만 더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만족스러운 듯 금세 곤히 잠들었다.      


『피터팬』, 『눈의 여왕』에만 있는 줄 알았던 모험담은 〈말하는 꾀꼬리와 춤추는 소나무〉 이야기 속에도 있었다. 돌로 변해버린 오빠들을 구하러 가는 여동생은 절대 뒤돌아보면 안 된다는 두려움과 용기를 무릅쓰고 꾀꼬리와 소나무를 찾으러 떠났다. 


어떤 날은 〈전설의 고향〉을 보는 듯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밤이면 동물이든 사람이든 먹어치우는 구미호로 변하는 여동생 이야기 〈여우누이〉는 무섭기도 했지만 인기 만점이었다. 용왕이 준 하얀 병, 노란 병, 파란 병, 빨간 병을 던지며 여우를 물리치는 긴장감은 짜릿했다. 물론 나는 노란 병을 던지면 바위산이 나오는지 바다가 나오는지 기억해 내느라 없는 말, 있는 말을 다 가져 다붙였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소가 있었지.’로 시작하는 〈장돌뱅이 도둑〉은 소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도둑을 만나는 사람 이야기다. 우리는 이야기를 다 읽고는 얼마나 마음이 찡했는지 모른다. 장돌뱅이의 도둑질을 원님에게 이르지 않고 다시 소 판돈을 갖다 주는 이를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도둑을 보고.     

 



옛날이야기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선한 사람 곁에는 늘 질투하는 욕심쟁이 인간이 등장했고, 못된 이를 혼내주는 도깨비가 등장했다. 제 잇속만 차리는 고을 원님은 언젠가 지혜로운 평민에게 당하곤 했다. 호랑이와 두꺼비는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과 교감할 줄 알았다.


옛날이야기의 주인공은 공주와 왕자가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 속에 나의 모습이 있고, 내 속내가 보이기도 했다. 주막에 앉아 막걸리 한 잔 들이키며, 아낙네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우리에겐 대대로 흥이 있고, 지혜가 전해 내려오며, 사람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었다.      


아무리 유명한 유럽 작가의 동화도 아이들과 함께 읽다 보면 감흥이 떨어질 때가 있었다.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공감의 밀도가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 옛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고스란히 마음에 스며들었다. 





수없이 많은 밤을 옛이야기를 들려주며 보냈다.


삼태기, 장가, 메주, 갓, 곳간, 중의, 장돌뱅이... 


옛이야기 속에는 나도 사전을 찾아봐야 할 요즘 쓰지 않는 토박이말이나 단어도 많았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아이들은 중간중간 단어 뜻을 자주 물었는데 이야기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자연스레 짐작하는 듯했다. 주막은 쉬었다가 밥도 먹고 막걸리도 한 잔 하는 곳이려니, 신령님은 사람이 못하는 일을 뚝딱 해주는 요정 같은 사람이려니 하고 말이다. 


몇 번 읽고도 생각이 안 날 때도 많아 다시 책을 들여다봐야 할 때도 많았다. 디테일을 살려서 맛깔나게 얘기해주고 싶은데 큰 줄거리만 생각나니 답답하기도 했다. 나중엔 게을러져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어느 날, 서정오 선생님의 『옛이야기 들려주기』를 읽다 보니 한결 편해졌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는 미덕 중에 하나가 ‘어깨에 힘을 빼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고 싶은 내 마음이 흥을 떨어뜨렸다. 교훈을 주려는 의무도 가지지 말고, 앞뒤 안 맞는 대목도 따지려 하지 말라고 했다. 이야기꾼에 따라 이야기꼴이 달라지니 나는 내 개성을 살리면 되는 것이다.  




나는 한참 주위에 엄마들에게 옛이야기 전도사가 되었다. 우리 집 아이들에게만 해주기는 아까웠다. 세상의 많은 아이들이 좋아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나에게 옛이야기는 사람 사는 이야기 같아 좋았다. 

아이들은 옛이야기가 그저 재미있단다.      


재밌으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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