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Jun 05. 2024

너 욕 좀 하지?

엄마도 같이 읽어볼까

며칠 전, 아이의 학교 앞 분식집에 갔을 때다.

나는 치즈김밥과 라면을 주문하고, 아이들과 함께 늘 앉던 테이블에 앉았다. 앞 테이블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남학생들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작은 가게라 아이들이 하는 말이 고스란히 다 들렸다. 씨로 시작하는 욕을 섞지 않고는 한 마디를 넘어가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라면을 먹는 동안 귀가 꽤 불편해졌다. 


“이모, 안녕히 계세요!”

방금 연신 욕을 하던 아이들이 맞나 싶게 그들은 사장님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착한 애들인데 사춘기가 와서 그래요.”

사장님이 민망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천진난만하게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그 책이 떠올랐다. 

『욕 좀 하는 이유나』. 

유나도 찰지게 욕을 잘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찾다가 우연히 제목이 눈에 띄어 빌렸던 책이다. 

그림책이야 그림을 훑어보고 빠르게 읽어보면 되지만 처음에 동화책을 고르는 건 나에게 막막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읽을 수도 없으니 추천도서를 찾아다니느라 바빴다. 동화를 몇 권 읽어본 후에는 나름대로 책을 골라 보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재미없을 것 같으면 아무리 추천도서라도 다시 넣어두었다. 일단 제목이 끌리면 아이들이 책을 펼쳐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합격이었다. 이런 제목이라면 나도 읽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글자도 크고, 여백도 많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유나는 아주 매력적인 여자 아이다. 

단발머리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즐겨 신는 아이. 무려 태권도 2품에 닭강정을 좋아하는 다부진 3학년 꼬마 아가씨. 옆집 엄마는 드세다고 할지 모르지만 알고 보면 정의와 의리에 불타는 친구. 같은 또래가 봐도 밝고 야무진 아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시련이 닥친 날이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했다 1초 만에 거절당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돌멩이를 발로 힘껏 찼는데 누군가 아야하고 소리친다. 소미라는 친구다. 화를 낼 법도 한 소미는 유나에게 오히려 닭강정을 사주며 할 말이 있다고 한다.


“너, 욕 좀 하지? 나한테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소미는 욕을 잘하고 싶은데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화가 나면 자기도 막 욕을 해보고 싶단다. 욕이야 집에 있는 중학생 오빠나 할머니에게 어깨너머 배운 게 9단이긴 하지만 막상 누군가 욕을 가르쳐 주라 하니 유나는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소미는 그냥 중학생 언니들이 하는 욕을 하고 싶은 게 아니란다. 


그런 흔한 욕 말고 좀 더 창의적인 욕.

존, 개를 앞에 붙이면 오빠가 하는 욕이 되지만 소미의 요구사항은 다르다. 어이가 없다 생각하면서도 유나는 오빠에게도 물어보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고, 누워서 이런저런 단어를 조합해 보다 꿈까지 욕으로 꾼다. 


새로운 욕을 찾아 헤매다 알게 된 인물이 있다. 소미와 함께 영어학원에 다니는 임호준. 

영국에서 살다 왔다고 세련되게 영어로 욕을 한단다. 아무 잘못도 없는 소미에게 욕을 한다니 유나는 복수계획을 짠다. 산타 할아버지한테 이런 선물을 줬다고 펑펑 울었던 국어사전을 꺼내 눈에 띄는 단어들을 적어본다. 그리고 조합해서 새로운 말을 만들어 본다.


대망의 날. 

유나는 3학년 1반 임호준을 불러낸다. 


“이 씨알머리 없는 무뢰한아. 너 무뢰한이 뭔지 알아? 너처럼 무례한 사람을 말하는 거야. 생긴 건 딱 넓적 송장벌레처럼 생겨 갖고.”


유나는 기세를 몰아붙여 쉴 새 없이 자신이 조합한 단어들을 쏟아냈다.

나는 유나가 만들어낸 새로운 욕을 듣고 그야말로 빵 터졌다. 호준이가 좀 짠하기는 했지만 속이 다 시원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유나와 호준이의 대치 장면이 가장 재미있었다고 했다. 사실 욕대결처럼 보이는 장면이 하이라이트 같지만 욕을 둘러싼 아이들의 이야기는 곳곳에 그들만의 성장을 담고 있다.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단어 앞에 ‘씨’를 붙이거나 말이 거칠어질 때 엄마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어디서, 누구에게 저런 말을 배워왔을까 남의 아이를 탓하려 들기도 한다. 


왠지 하면 안 될 것만 같으면서도 학교에서 형이 있는 아이들이 뱉으면 기세가 등등해 보이기도 하는 욕설. 아이들은 재미로 따라 해보기도 하고, 화가 났을 때 나도 모르게 들었던 욕이 나오기도 할 테다. 소미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욕으로 뱉고 싶을 수도 있다. 별 뜻 없이 또래 아이들 간의 유대감을 이어주는 허세코드일 때도 있다. 


어른들이 금기시하는 욕에 대해 아이들도 가끔은 혼란스럽지 않을까. 책 속 주인공 유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고 딱 자르기만 했을 것이다. 우리 집 아이들에게도 물었다.


“너희들도 욕하고 싶을 때가 있어?”

“있지. 화날 때, 짜증 날 때, 친구가 놀릴 때.... 나쁜 말을 하고 싶어. ”

“그럴때 욕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좀 풀려?”

“할 땐 그런 거 같은데 찜찜해.”


엄마도 솔직히 욕을 할 때도 가끔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욕을 한다고 해서 그 감정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아이는 2학년이었을 때, 친구가 한 욕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한동안 그 욕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이 책이 어둡게만 생각하게 되는 욕에 대해 유쾌 발랄하게 풀어놓은 점이 참 좋았다. 나도 킥킥대며 웃느라 혼났다. 옆에서 아이들이 엄마가 왜 저러나 하고 쳐다봤다. 어쩌면 욕은 아이들의 일상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쁜 말이니 하지 말아라 정도로 막기만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다. 


욕에 대해 아이들이 느낄만한 찜찜한 감정들도 유나가 잘 대변해 주었다. 심한 욕은 듣기만 해도 머릿속에 쓰레기가 저장되는 듯한 느낌,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 호준이에게 복수해 주면 마냥 기분이 좋을 줄 알았지만 배가 고픈데도 입맛이 없는 느낌.


유나가 욕만 잘하는 건 아니다. 분별력이 있는 아이다. 부당하게 친구에게 당하는 건 잘못된 일이라 말할 줄 알고, 친구의 사과는 쿨하게 받을 줄 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그런 유나를 보며 천천히 그리고 함께 성장할 것이다.


내가 쓰는 언어가 곧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아이들도 서서히 알아갈 것이다.

단지 감정을 조절하고, 거르고 분별하여 말로 표현하고, 나만의 언어로 만들어가는 작업은 꽤 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나뿐 아니라 상대를 살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이 서투른 건 어른도 마찬가지다.  나도 혼자 조용히 욕을 중얼중얼거릴 때가 있다. 아이들이 내 말을 안 들을 때, 운전할 때, 싫은 사람이 있을 때.... 1일 1팩은 하면서 매일 나의 언어를 다듬어가는 일에는 소흘하다. 어쩌면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일일 테다.


태권도장에서 고려 품새를 연습 중인 유나에게 일 학년 동생이 다가온다. 욕 좀 가르쳐 달라고 말이다. 유나는 허리띠를 단단히 묶으며 묻는다.

“무슨 일인데?”

역시 포스 있는 검빨간 띠 누나다.  

이전 09화 그날따라 긴긴 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