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소설로서의 '채식주의자'
개인적으로 1000만 찍은 영화는 작품성이 어떻던 다른 사람이랑 소통하려면 꼭 봐야한다는 쪽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화제가 된 한강 작가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를 방금 완독했습니다. 이제는 저도 조금 아는척 해볼 수 있게 되었네요.
아무래도 기괴하다는 '채식주의자'에는 확실히 기괴한 성애묘사가 나옵니다. 표현이 노골적인 것도 있겠지만, 상식을 벗어난 묘사들이 더욱 기괴한 느낌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사실 이런 기괴한 성애묘사는 선역과 악역의 경계를 흐리게하고 완급조절을 하기 위함입니다.
채식주의자를 '에코 페미니즘' 소설로 보면 결국 진 주인공인 둘째딸은 남성 등장인물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역할로 보는게 맞는데요.
아버지도 그렇고 전남편도 그렇고 남성 등장인물들은 가해자이긴 하지만 일방적인 가해자로 그리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는 폭력적이지만 둘째딸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는 모습으로, 전남편은 사랑없이 집안일 시키려고 결혼했지만 이혼에는 결국 채식을 계속하는 전부인의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방식으로요.
두 사람 외에도 주인공과 성관계를 맺는 형부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애가 묘사되는 두 사람은 한명은 정상인 한명은 정신질환자로, 원래는 정상인이 정신질환자를 착취하는 구도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상인인 남성이 비정상적으로 성애에 집착하는 모습을 연출해서형부 또한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설명하는데요.
이로써 둘의 관계가 정상인-비정상인의 성적착취 구도가 아닌, 사실은(다소)비정상인-비정상인의 애매한 구도임을 설명해 완급조절을 해내는데 성공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이러한 완급조절은 다른 유명한 페미니즘 소설인 '82년생 김지영'과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해당 소설에서는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편향되게 내용을 몰아갔었거든요.
그런데 채식주의자에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흐리게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채식을 하는 주인공이 정신병자로 묘사되고, 또 건강도 잃는 모습을 보면서 이 소설이 비건을 조롱하기 위한 소설이라는 평도 있었다는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말도 안 되는 주장이죠.
성애에 대한 부분도 밑도끝도 없는 포르노 이런거는 아니고 나름대로 피해자-가해자 관계에서 경계를 흐리게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 꼭 필요한 장치이긴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 유해도서가 되면 안 된다, 이런 얘기까진 아니지만요)
안본눈 삽니다 이런 얘기 많던데 솔직히 유쾌한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책 읽고 쓸 얘기는 확실히 많아지는거 같아서 읽기는 잘 읽은거 같네요. 페미니즘과 관련해서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