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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R Feb 24. 2021

현재를 살기 위한 생각 죽이기

나름대로 과거의 생각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았다.

유독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 커피를 두 잔 마신 날, 낮잠을 잔 날. 그리고 가끔은 아무 이유 없이도 불면의 밤은 찾아든다. 잠이 들지 못한다는 건 내일 하루 종일 피곤할 거란 걸 알고 있는 나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고 잠들어보려고 애쓰고, 그 노력은 더욱 나는 깨어나게 만든다. 피곤한 다음 날보다 더 나쁜 점은, 잠이 오지 않는 날이면 그 자리를 생각들이 메운다는 것이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하루 중 가장 평화로워야 할 순간에 내 머릿속은 가장 복잡해진다.


고작 31살. 정확히 세면 3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인생을 오래 산 것도 아닌데 사는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굳이 떠올려보자면 슬펐던 일, 억울했던 일, 미안했던 일 같은 다시는 보기 싫은 기억들이 먼저 솟아난다. 무난한 일상은 쉽게 잊히고 재밌었던 시간은 그때 참 좋았지, 하고 가볍게 지나치게 되는 반면 좋지 않은 기억들은 머릿속에 남아 더 많은 생각을 만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마 그래서 더 크게 느껴지나 보다.


내가 참았던 순간, 억울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그 순간 그 사람에게 따지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혹시 그 상황이 다시 온다면 뭐라고 할지 복습 아닌 복습도 하고, 그 순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은 이들에 대한 원망도 해본다. 그러고 나서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을 채운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선택의 순간을 굳이 다시 내 머릿속에 불러들여 생각을 이어간다.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하는 자괴감도 함께.


그리고 그렇게 분노, 후회, 자괴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나는 긴 밤 동안 이불을 뻥뻥 차다가 세네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든다. 그 시간이 되도록 이어진 생각 끝에 결국 원망의 화살은 다 나 자신을 향하고, 나 자신의 모든 것이 싫어 몸부림치 고나서야 지쳐서 잠이 든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간 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해진다는 것이다. 지난밤의 생각들은 나의 시간과 감정만 소모하고 그렇게 없었던 일이 된다.


생각이란 게 참 무섭다. 사고도 사색도 아닌, 텅 빈 시간을 찾아 나를 수렁으로 끌어내리는 생각이란 참 위험한 존재다. 이런 시간을 수없이 겪고 난 후 언제부터인가 생각의 수렁에서 살아남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내 평화로운 휴식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몰려올 때면, 창과 방패처럼 나는 생각을 죽였다. 생각은 생각으로 죽여야 한다. 나는 아주 단순하지만 기분 좋은 생각으로 내 머릿속을 채웠다. 고양이 사진이나 짧은 영상, 내일 산책할 장소 고르기, 간식 고르기,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 영화보기 같은 아주 일차원적이고 쉬운 것들로. 처음엔 어려웠던 것들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니 제법 유용해졌다. 다만 이런 생각 죽이기는 본질적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어릴 적 빨리 어른이 되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내게 부모님은 '어릴 때가 가장 좋을 때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일궈 나간다는 기분이 드는 어른이 된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다만 한 가지 어리다는 것에 대해 부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돌이켜볼 생각이 많이 않다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기억들이 많지 않다는 것. 살아온 시간만큼 이제 많은 기억들을 쌓아 놓은 31살의 나는 몇 번이나 잊음을 통해 달아날 계획을 세웠었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던데, 그러기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다. 빨리 망각하고 싶은 기억은 오래 지속되고, 잊을만하면 다시 떠올라 나를 괴롭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라서 기억도 생각도 모두 주관적이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한 일조차 빨리 잊어버린다거나 합리화해서 더 나은 사람은 못 될 지라도 본인 정신 건강에는 좋은 축복받은 삶을 산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고통받은 기억을 끌어안고 살며, 종국에는 이 모든 일들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사람일수록 생각에서 더 고통받는다. 좋은 사람일수록 사소한 흠이 있는 기억도 오래도록 되뇌며 자신의 탓을 하며 힘들어한다. 종래에는 끝없는 자기혐오의 굴레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생각으로 고통받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실은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놓아줘야 한다. 생각을 죽이고, 묻고, 그 생각이 썩어서 완전히 사라지게.


요즘의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생각들로 인해 미워했던 나를 다독여주고 있다. 가끔은 명백한 내 잘못에도 나만큼은 내 편을 들어준다. 넘치는 생각으로 인해 괴로워하기보다는 생각을 죽이기를 택하고, 좋은 사람으로 고통받기보다는 못된 사람으로 내 마음이 편한 쪽을 택하려고 한다. 그렇게 언젠가는 과거를 기억을 놓고 온전히 현재를 살 수 있게, 생각을 애써 죽이지 않아도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 오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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