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호의가 남에게 항상 호의인 것은 아니다.
정말 오지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했던 적이 있다. 출퇴근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해서 모든 교직원들이 관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다. 당시 한 선생님께서는 아침이면 언제나 밥과 국을 준비해 챙겨드셨는데, 혼자 있는 내가 신경 쓰이셨는지 매일 아침 내게 밥을 먹으러 오라고 연락을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이렇게 제대로 된 아침밥을 누군가 내게 챙겨준 것은 참 오랜만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침잠이 많아 오분이라도 더 자고 싶었던 것도 있었고, 나보다 한참 어른이 챙겨주시는 밥을 그저 얻어먹는 것은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나도 아침이면 이것저것 준비하기 시작했고, 부족한 아침잠은 더 줄어들고 나는 스트레스를 얻었다.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아침 식사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 선생님과의 관계도 어색해져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학교에서 근무를 하며 반대의 상황을 겪었다. 새로 동학년이 된 선생님께 내가 도움받았던 정보를 이것저것 권유했었는데, 그분은 새로운 것을 접하기보다는 기존의 방식에 마음 편해하시는 분이었다. 내 호의를 이해하셨을지라도 원하지 않는 호의였기에 달갑지 않으셨을게 분명하고, 나 역시 나름대로 더 편안한 방법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거절당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기준대로 생각하고 남의 편의를 내 멋대로 판단한 것이니 분명 내 실수였는데도, 나는 내 마음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심통이 났다.
두 일을 겪고도 조금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 있는데, 바로 호의에는 상한선이 있다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허용되는 호의의 상한선. 베풀었을 때 모든 이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 모두에게 호의로 여겨질 수 있는 선. 사람들이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듯 성격도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고 싶어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호의가 호의가 아니기도 한다. 나는 내가 직접 겪어놓고도 내 호의가 남에게 호의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호의의 상한선을 지키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착한 사람이 되라고 배워왔고, 그래서 타인의 관점이나 상황을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착한 일을 하는 것이, 호의를 베푸는 것이 먼저가 돼버리기에 그렇다. 심지어 내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더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고집스러워지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남의 마음은 내 마음 같지가 않다.
호의의 상한선만 잘 지킨다면, 인간관계는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남을 돕겠다는 선의의 마음을 줄여야 한다니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지만, 대신 남을 더 이해하는 공감능력으로 그 빈자리를 대신하면 된다.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은 바이러스에게서 우리를 지켜주는 사회적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잘못된 감정적 오지랖에서부터 서로를 지켜주는 정서적 거리두기도 필요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