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는 게 자연스럽던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선택의 문제로 많이들 분류한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이 제도 속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영원히 들어오지 않을 것처럼 버티던 사람들마저
막차를 잡아타듯 부랴부랴 이곳으로 들어온다.
소수에서 다수에 들었다는 안도감. 인생의 큰 숙제를 마친 것 같은 기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는 어른들의 잔소리와 친구들의 눈초리.
평범함을 얻은 대가로 나라는 특별한 존재가 한순간 없어지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이렇게들 살아가니 이걸로 됐다 싶다.
결혼 전 나는, 왜 모두가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내가 본 결혼생활은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제도 투성이었다.
물론 나를 길러주신 따뜻한 부모님에게는 언제나 감사하다. 온전한 가정 속에서 밝고 곱게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들은 자주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무례한 시댁 사람들, 그 어린 나에게도 버겁게 느껴지던 엄마의 삶의 무게, 그 많던 제사들,
엄마도 그렇고.. 아빠는 도대체 어디서 행복을 찾을까? 생각하던 순간들
두 분 모두 많이 애쓰고 계셨지만 어린 나의 눈에 두 분이 많이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제도 속으로 들어왔고, 심지어 결혼적령기로 치부되는 나이에 결혼해
아이까지 야무지게 출산했다.
중학교 때부터 결혼이 싫어요. 를 외치던 아이치곤 너무 순순히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나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뭐에 홀린 듯 가정을 이뤘다.
예를 들면 배고프니 먹고 싶다, 졸리니 자고 싶다, 처럼 원초적인 욕망들 가운데 하나여서 그냥 하게 되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모두가 이렇게 하나가 되어 결혼을 응원하고
이 모순적인 제도 속으로 들어오냐는 말이다.
막상 가정을 이루고 사는 기혼자들 중 그 누구도 두 팔 벌려 기혼자의 세계로 오라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느니, 혼자가 편하다느니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미혼자들에게 이런 말들은 가진 자의 여유 같은 헛소리에 가깝게 들리나 보다.
다들 그렇게 콧방귀를 뀌며 알아서들 짝을 찾아 이 세계로 발을 디딘다.
나 역시 언니들의 이상한 충고를 무시하며 결혼에 성공했다.
이 남자는 이래서 안 되고 저 남자는 저래서 안되고 그냥 혼자가 낫다는 말.
자기들은 그 이상한 남자랑 결혼해서 잘만 살면서 말이다.
인연을 찾아 결혼에 골인하고 나니 그제야 한숨이 돌려졌다. 진짜 인생의 큰 숙제가 맞긴 맞았다.
마치 이런 것 같았다. 맛집이라 불리며 길게 줄을 늘어선 식당과 그 바로 옆, 아무도 앉아있지 않은 텅 빈 식당
분명 같은 메뉴를 팔고 있는데 이상하게 장사가 잘되는 집과 안 되는 집이 있다.
식당 상태도 비슷하고 겉보기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왠지
텅 빈 식당으론 발길이 가지 않는다.
들어가기만 하면 음식도 일찍 나오고, 줄 서서 기다릴 일도 없을 텐데 본능적으로 가고 싶지가 않다.
반대로 줄을 길게 늘어선 맛집이라 불리는 식당은 회전율도 빠르고 잘만하면
나도 들어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이렇게 줄을 서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한 번쯤은 줄을 서서 먹어보고야 만다.
군중 속에 있어야 마음이 편안하다. 다수의 선택이 맞아 보이고 모두가 예스를 외칠 때
그냥 따라서 예스를 외치는 것이 노를 외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어른이 되면서 안다.
나와 피부색만 달라도 신기하게 쳐다보게 되는데 한평생 남들과 다른 선택으로 살며
무수한 질문에 대항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결혼 초, 이상하게 안정적인 이 느낌은 뭘까 하다 어렴풋이 알게 된 건 내가 다수에 속했다는
안도감이었다는 걸 알았다. 나도 남편이 생겼다.
누군가 결혼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혼 후의 좋은 점은
이제 더 이상 결혼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점은
이점을 뺀 나머지 전부라고.
그럼에도 다들 그렇게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아마 십 년 뒤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사는 이유를 다시 묻는다면 다른 답변을 할지도 모르겠다.
울 엄마 말처럼 혼자는 외롭다느니, 늙으면 자식 없이는 아무 의미 없다느니 하는 대답 말이다.
자식에게 의미를 찾는 엄마에게 나는 그다지 훌륭한 자식이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엄마는 삶의 의미를 우리라고 말하신다.
나는 아직 삶의 의미를 타인에게서 찾을 만큼 이타적인 인간이 아닌가 보다.
자고 있는 아이가 사랑스럽지만 내 삶의 의미자체는 아니다.
그저 삶의 일부분으로 결혼과 아이를 선택했고, 나는 여전히 이 부분을 선택의 일부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