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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하니 공부가 재밌다

by idle

어린 시절을 경주에서 보냈다. 내가 친구들과 뛰어놀던 장소들은 대부분 신라의 유적지였다. 지금은 올라갈 수 없는 대릉원 위에서 포대자루로 미끄럼을 탔다. 할머니 산소가 경주 남산에 있어서, 할머니를 찾아 뵐 때면 바위에 새겨진 신라시대 불상들을 마주 했다. 어린 시절 난, 산에 있는 큰 바위에는 당연히 불상이 있는 건 줄 알았다. 여름 방학은 불국사 어린이 학교를 다녔고, 경주 박물관을 놀이터 삼았다. 집에는 ‘어린이 삼국유사’ 책이 있었다. 삼국유사는 몇 번을 다시 봐도 재밌었다. 어릴 때 달달 외울 정도로 읽어서인지 삼국시대 역사는 아직도 머릿속에 그려진다.


경주는 땅만 파면 유적이 나오는 곳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초 환경미화를 할 때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다들 집에 신라시대 유물 하나씩은 있죠? 우리 교실을 미니 박물관으로 꾸며 볼까요?”

“네~”

“집에 없으면, 경주는 땅만 파면 기와 조각 하나라도 나오니 꼭 하나씩 가져와요.”

“네!”

신라시대 유물을 가져오라는데, 다들 별 문제없다는 듯 대답했다. 정말 대부분의 아이들이 집에서 유물 하나씩을 가져왔다. 신라시대 기와 조각, 술잔과 같은 것 들은 경주에서 정말 흔한 것이었다.

경주 대릉원


어린 시절 환경이 그러했기에 자연스레 역사를 좋아했다. 역사 수업 시간은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단점이 있었다. 수업시간은 그 어느 과목보다 재밌었으나, 시험은 그렇지 않다. 역사 시험 단골 출제 방식은 시대순 나열이다. 굵직한 사건의 나열이면 어렵지 않겠으나, 정말 기억하기 어려운 내용을 시간순으로 배열하라고 하면 머리가 아프다. 그나마 그때는 객관식이었으니 대략 찍으면 어느 정도 점수는 나왔다.


대학교 1학년 학부 때 사학과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역사를 좋아해서 사학과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는 생각도 어느 정도 있었다. 사학과 수업은 한층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역시, 시험은 달랐다. 사학과 전공 시험은 주제 하나를 정해주고 논술하라는 거였다. 시험지 한 장을 앞뒤로 꽉꽉 채워 적고는 이만하면 됐겠지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머리를 숙인 채 두 번째 시험지를 채우고 있었다. 고개 숙인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시험지를 제출했다. 그래도 내용은 알차게 적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성적은 나빴다. 사학과는 나와 맞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다른 전공을 선택했다.


난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노는 학생도 아니었지만, 공부는 재미가 없었다. 다만, 책을 좋아하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책은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공부는 시험 보기 전에만 했다. 평소에는 빈둥거리다가 시험 일주일 전부터 교과서를 외우기 시작했다. 벼락치기만 했는데, 성적은 곧잘 나오는 편이었다. 엄마는 항상 ‘네가 노력만 하면 더 잘할 텐데, 왜 노력을 안 하니?’라는 얘기를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벼락치기만 해도 성적이 잘 나온 건,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서인 것 같다. 문제 이해력이 괜찮았다. 객관식 시험은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답이 보였다.

암튼 난 공부를 무척 싫어했었다.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쇼핑지원금으로 책을 잔뜩 샀다. 공부를 그렇게 싫어하던 학생이 말이다.


시험을 목적으로 하는 공부와 내가 재밌어서 하는 공부는 달랐다. 사회탐구 영역 중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경제였는데, 스스로 경제 서적을 사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재테크를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경제 흐름을 모르고 무턱대고 하면 안 될 것 같아 구매한 책이다. 내 용돈만 가지고 주식을 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은퇴 후 생활비를 가지고 투자를 하려니 실패가 두려워졌다.


역사 공부가 하고 싶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한 책도 샀다. 학생 때 배운 역사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반적인 흐름 파악을 위한 책을 사고 싶어 골랐는데, 아직 다 읽지 못해 잘 산 건지 알 수 없다. 좋은 책을 고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쌓인 책 중 아직 시작도 못한 것들이 많다. 책이 쌓여 있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저걸 언제 다 읽지? 여유 있게 한 권씩 보면 되는데, 여전히 난 성급하다. 책상 옆에 책을 쌓아두고 그때의 기분에 따라 조금씩 읽고 있다. 책 욕심은 아직 버리지 못했다. 공부를 위한 것이니 다시 한번 괜찮다. 괜찮다.

언제 다 읽을지, 마음이 무겁다.

토지는 남편이 읽고 싶다고 해서 전집을 샀다. 난 중학생 때 다 읽기는 했는데,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읽고 싶다던 남편보다 내가 먼저 읽기 시작했다. 중학생 감성으로 읽을 때는 줄거리만 보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 읽는 토지는 완전히 다르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음도 있겠지만,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픔에 좀 더 공감하며 읽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이후부터 일제시대 우리 민족이 겪었던 아픔에 공감하고, 복잡 미묘한 관계로 인한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한다.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내가 아는 사람인 것만 같다.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묘사가 생생하다. 아래는 주인공 서희의 심리 묘사이다. 글을 잘 쓰고 싶어 하는 나에게 토지는 소설이 아닌 교과서와 같다.

날이면 날마다 보이지 않는 뭇시선 속에서 서희는 깊은 곳을 뻗쳐 들어가고 있는 뿌리를 쓸어대는 톱질 소리를 듣는다. 그럴 때마다 뿌리는 더욱 깊은 곳으로 뿌리는 더욱더 강인하게, 그것은 서희의 욕망이요 생리요 아집이다. 불도 살라 먹으려는 무서운 집념이다.

‘토지 2부 3권, 제4편 용정촌과 서울, 1장 묘향산 북변의 묘’에서 발췌


학생 때도 안 하던 공부를 은퇴 후에 시작했다. 이제 시작했으니 60, 70이 넘으면 좀 더 깊이 알게 될까? 역사를 좋아하니 역사를 주제로 글을 잘 쓰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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