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마흔에 은퇴했다. 2020년, 이제 작년의 일이고, 은퇴를 준비한 지는 5년 만이다. 브런치에는 은퇴를 결심했던 5년 전 이야기부터, 은퇴 후 지금의 일상까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시간순으로 남기고 있는 중이다.
부부가 같이 이른 은퇴를 했다고 하면, 주변에서 대체로 신기하게 바라본다. 문득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어떻게 은퇴를 하게 되었는지 설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오래전부터 마흔에 은퇴하는 게 꿈이었다고 했다. 자기는 백수가 체질이라며,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편이다. 서른에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한 달간 동남아로 배낭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미리 준비된 여행도 아니었다. 여행책 한 권을 사서는 책 설명을 보고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다녔다. 그는 그 시절을 항상 그리워했다.
그는 운동이나 그림, 악기 등 새로움 배움을 자주 시도했는데, 신기하게도 무엇을 하든지 바로 평균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항상 거기서 만족했다.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고, 잘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를 보고 주변 사람들은 천상 ‘한량’이라고 이야기한다.
난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는 노는 법을 모르는 충실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갈 때쯤 평범한 일상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삶의 이정표대로 행하고 있다는 느낌이 싫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 서른이니 이제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야 했다. 한 번도 일탈을 해본 적 없던 나의 삶이 지루해 보였다. 그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조금씩 시도해보자 결심했었다.
일탈을 꿈꿀 때 남편을 만났다. 천상 한량인 그와 일탈을 꿈꾸는 나는 취향이 비슷했다. 거슬리는 게 많은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찾기보다, 거슬리는 게 없는 것을 찾았다. 거슬리는 것들이 많으니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남에게도 하지 않으려 했다. 거슬리는 게 많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말에도 상처를 받는다. 남편은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 놓아 버렸고, 난 상처투성이로 헤처 나갔다. 일탈을 꿈꿨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삶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여전히 불안했다.
남편이 은퇴를 목표로 하던 해, 혼자 힘으로는 수도권에 집을 구하기 어려워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돈이 없으니 결혼해야겠다는 얘기는 내가 꺼냈다. 남편은 그걸 가지고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말한다.
결혼 후 남편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세계여행을 떠나자 했다. 서른에 떠났던 배낭여행을 그리워하며, 더 나이 들면 그런 여행은 가기 어려울 거라 했다. 농담처럼 꺼낸 그 말에 나의 꿈도 은퇴가 되었다.
사실 은퇴 전까지 끊임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까. 은퇴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내가 불안해할 때마다 남편은 내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안심시켜주었다. 5년 동안 우리는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다. 그 시간들이 쌓여서 우리의 계획은 더 탄탄해졌고, 불안했던 마음도 차츰 가라앉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깊게 고민도 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시작했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은 꿈이 많았는데, 커가면서 “좋은 학교를 가서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해야지.”가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회사생활은 한 해 한 해가 버거웠고, 은퇴 이후의 삶은 막연했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모아야지’, ‘돈이 많으면 은퇴 이후에도 괜찮을 거야’라고만 생각했지, 은퇴 이후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행복할까 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었다.
은퇴 후 보내야 할 시간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길다. 회사에서 십여 년 세월을 보내면서 난 어느덧 회사일 말고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릴 때 꿈도 잊었다. 돈이 많다고 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거다. 우리는 5년 동안 돈보다 은퇴 이후 어떻게 행복한 삶을 보낼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다. 이제 인생의 절반쯤 살았다. 그동안 남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왔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에 대해 잊고 살아왔다. 은퇴했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난 한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작가였다. 막연한 꿈이었을 뿐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본 적은 없었다. 은퇴 후 글쓰기부터 시작한 이유다. 내가 글쓰기를 잘하는지, 좋아하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루에 조금씩 노력해볼 뿐이다.
은퇴 후에는 하루에 한 가지만 해도 괜히 뿌듯하다. 책 한 권을 다 읽거나, 집안일 하나만 처리해도 보람 있는 하루를 보낸 기분이다. 회사에서는 하루에 수많은 회의와 결재, 메일 수십여 통을 처리했는데, 하루에 하나만 하는 것이 너무 게으른 건 아닌가 자책할 때가 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하루에 1가지만 해도 1년이면 365가지를 하는 거야.”
은퇴 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루에 한 가지씩 하며 보내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두 달 동안 제주 살이를 시작했다. 다음 글부터는 제주살이 관련 글을 한번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