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금쯤 따뜻한 남쪽나라에 있을 줄 알았는데

by idle

남편은 겨울을 싫어한다. 추운 날씨를 견디기 어려워 그 좋아하는 산책도 잘 다니지 않는다. 좁은 집안을 산책하듯 걸어 다니거나 넓은 실내 공간을 찾는다. 그래서 우리는 백화점을 간다. 산책을 위해서다. 쇼핑을 위한 공간이니 아무래도 빈손으로 돌아오는 법이 잘 없었다. 겨울 옷만 많은 이유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백화점 산책도 좀 주저하게 된다.


은퇴하면 겨울에 3개월 정도는 따뜻한 동남아에서 살아보자고 얘기했었다. 물가가 저렴한 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면 생활비 부담도 줄 것이라 생각했다. 의료보험비 3개월치를 내지 않으니 항공권 비용은 될 것이고, 물가가 저렴하니 생활비를 아껴서 집 렌트 비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을 갈 수 없다.


남편은 작년에 은퇴를 계획하며 3월은 홀로 방콕 여행, 6월은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떠나기로 했었다. 난 5월 황금연휴에는 은퇴 전 마지막 호화 여행을 가자며 발리를 목적지로 정했다. 은퇴를 기다리며 회사에서 하루하루 힘든 날들을 보낼 때, 여행 준비는 힐링이었다. 힘들 때마다 여행 준비를 하나씩 마쳤다. 작년에 우리가 계획했던 여행은 6개월 전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코로나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모르고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하며 취소 가능 기한을 넘어서까지 상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코로나 확진자는 늘어만 갔고, 여행 예정일을 코앞에 두고서야 우린 포기했다. 수수료를 내긴 했지만 대부분은 취소를 해주었다. 딱 하나 발리 우붓의 리조트만 제외하고. 여행 비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숙소다. 발리를 갔으니 풀빌라는 한번 가봐야지 하며 무리를 해서 예약한 숙소였다. 다행히 1년 내 가능한 날짜로 연기는 해준단다. 설마 이때는 되겠지 하며 2021년 4월로 변경했었는데, 얼마 전 올해 11월 말로 다시 한번 연기했다.




지금은 경기도 남부 지역에 정착해 살고 있지만, 서울에서 오랜 기간 살았다. 그때는 서울이 좋은 줄 모르고 늘 가던 곳만 찾았다. 작년 가을 즈음 서울에서 2주 정도 살아볼 기회가 생겼다. 우리는 낯선 서울을 여행하기로 했다. 숙소는 남산에 있었다. 주말 남산은 늘 사람들로 붐볐었다. 남산에 살면 평일에 한산한 남산을 볼 수 있겠다며 기대했다.


남산 둘레길은 한 바퀴를 돌면 7km 정도, 2시간이 살짝 넘는 산책길이다. 서울 여행 2주 동안 우리의 일과는 남산 둘레길 산책으로 시작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짙은 녹색으로 빽빽했을 숲은, 이제 빛바랜 연둣빛이었다. 봄날의 싱그러운 연두와는 다른, 쓸쓸하고 우아했던 연두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노란색, 붉은색으로 화려하게 변해갔다. 산책길에서 매일 달라지는 숲을 바라보는 것은 새로 알게 된 즐거움이었다.


산책을 마치고 거의 다 내려올 때쯤이면 점심식사를 마친 근처 직장인들이 산책로를 올라온다. 목에 사원증을 걸고 하나 둘 무리를 지은 사람들. 일을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평일에 회사가 아닌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은퇴를 실감했다.


은퇴를 하니 특별한 계획 없이도 여행을 떠날 수 있다. 평일의 관광지는 조금 더 오래 머물며 그곳의 속내를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다.

변해가는 남산의 모습

겨울, 기온이 연속해서 영하 10도 가까이 떨어질 때였다. 산책을 하지 못한지도 일주일을 넘어가는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을 무척 싫어하는 남편은 우울해했다.

“남부 지방은 좀 따뜻하지 않을까? 남쪽으로 여행 갈까?”

남부 지방 날씨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수와 부산의 기온이 높은 편이었다. 제주 겨울은 항상 구름이 낮게 깔리고, 바람이 불어 우울했던 기억 때문에 기온이 높아도 제외했다. 부산과 여수 중 고민하다가 여수로 피난을 떠났다.


여수는 이미 여러 번 와 본 곳이라 관광이 목적은 아니었다. 맛있는 겨울 남도 음식을 먹고, 산책하기 위한 여행이다. 남도에 오면 늘 찾는 식당들이 있다. 한동안 찾지 못했던 음식이 가장 그리웠다. 오랜만에 맛본 음식들은 왜 이제야 찾아왔냐고 했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역시 맛있는 음식에 있다.

갈치조림, 여수돌게장, 광양불고기


여수에서 배를 타고 30분 정도 가야 도착하는 금오도는 이번에 처음 가보았다.

“그리스를 왜가? 금오도가 있는데.”

비렁길을 도는 내내 이야기했다. 금오도는 그만큼 바다색이 아름다웠다. 겨울이라 사람도 없어 여유 있게 섬을 즐길 수 있었다. 다만 비수기다 보니 식당들 대부분이 문을 닫아서 금오도에서 유명하다는 방풍나물은 먹을 수 없었다.


여수 여행 후 올라오는 길에 담양에서 떡갈비를 먹고 소쇄원을 보았다. 몇 년 전 처음 소쇄원에 갔을 때 많은 관광객에 둘러 쌓여 정원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었다.

“사람 아무도 없을 때 소쇄원 광풍각에 멍하니 앉아있고 싶다.”

첫 감상이 그러했는데, 평일 겨울 소쇄원에서 그 원을 이룰 수 있었다. 소쇄원을 전세 낸 듯 광풍각에 앉아 ‘언젠가 이렇게 대청마루가 넓은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며 둘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금오도, 소쇄원


지금쯤 따뜻한 동남아 바닷가에 앉아 햇살을 즐기고 있을 줄 았았는데, 우리의 모든 해외여행 계획은 취소되었다. 하지만 미리 여행 경로를 짜고 숙소를 예약해 두지 않으면 불안한 해외여행 대신 국내여행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우리는 이제 여행이 가고 싶다면 언제든, 문득 떠난다.




keyword
idle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