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에서
내 전투력은 53만입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너 드래곤볼 안 봤어? 프리저 몰라?”
“응, 몰라…”
“세상에! 슬램덩크는? 원피스는 봤어?”
늘 같은 무표정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나에게 말했다. 난 우리의 학창 시절을 풍미했던 만화들 중 본 것이 거의 없다. 나에게 만화란 머털도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정도? 다들 아는 만화를 보지 않았다고 해서 딱히 불편할 건 없지만….
너 내 동료가 돼라
“저 말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 거야?”
“내가 이렇게 상식이 부족한 사람이랑 살아 그냥.”
예능 프로그램 속 장면이나, 또래 친구들과 대화할 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나와 가끔은 이렇게 상식이 부족한 사람처럼 돼버린다. 그럴 때마다 그는 구박을 동반한 설명을 해주는데, 만화를 봐서 아는 것과 설명해서 듣고 아는 것과는 아무래도 공감의 차이가 생긴다.
난 어린 시절, ‘만화책은 나쁜 거니까 읽으면 안 돼.’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도서관에서 빌린 소설은 당당하게 거실에 앉아 읽었고, 같은 반 친구가 빌려준 오렌지 보이(꽃보다 남자 해적판)는 방에 숨어서 공부하는 척 몰래 봐야만 했다. 그렇게 친구들과 돌려보는 만화만 몇 번 봤을 뿐 만화가 좋아서 스스로 찾아본 적은 없었다.
“네가 앞으로 읽어야 할 명작이 어마어마 해. 부럽구먼!”
그는 나를 부러워하기도 답답해하기도 한다. 그가 처음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읽었을 때의 그 설렘, 즐거움을 난 아직 경험하지 못했으니까. 추억이 덧씌워진 기억을 떠올리며 부러워하다가도, 그 시절을 함께 나눌 수 없음은 답답해한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만화방에서 라면 끓여 먹고 싶다는 그의 말에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만화방을 찾았다. 이제는 그가 다니던 시절의 만화방 대신에 시간당 요금을 지불하는 만화 카페만 존재한다. 그래도 그 시절 추억의 만화만은 서가 가득히 꽂혀있다.
둘 다 회사에 다닐 때는 어쩌다 주말에만 한 번씩 갔었다. 평일 요금은 주말의 거의 반값이라 퇴사 후에는 더 자주 오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가게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는지 동네 만화 카페는 문을 닫았다. 그렇게 난 드래곤볼을 시작하고, 20권 정도 읽은 이후 1년간 멈춤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겨울만 되면 실내에서 놀만한 곳을 떠올린다. 겨울이 되자 동네 만화 카페가 사라져 잊고 있었던 드래곤볼 생각이 났다. 걸어갈 수는 없지만,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거리에 만화카페가 있었다. 유독 추운 이번 겨울, 낮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니 자주 만화 카페를 찾게 됐다. 올해 드디어 드래곤볼과 슬램덩크까지 끝냈다. 이제 나도 전투력 53만에 담긴 의미에 공감한다. 좀 더 상식이 풍부해진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제 뭐 보면 되나?”
“음.. 아직 완결이 안되긴 했는데, 이제 원피스?”
원피스라… 애증의 원피스. 내가 쇼핑 검색을 담당하던 시절 테스트 키워드는 늘 원피스였다. ‘쇼핑’을 담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원피스는 당연히 ‘쇼핑’ 키워드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통합검색’을 담당하는 사람에게 원피스는 중의적인 키워드였다. ‘원피스’를 검색하면 쇼핑이냐 만화냐가 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원피스라는 만화가 도대체 뭔데 쇼핑이 밀린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1997년에 연재를 시작해서 무려 100권까지 나왔는데, 아직까지 연재 중인 작품. 예전의 나 같으면 권수만 보고도 숨 막혀했을 거다. 과정의 즐거움보다는 빨리 끝내야 한다는 목적 지향적 인간이었으니. 지금의 나는 우와 읽을게 100권이나 있어로 변했다.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즐거움이 100권만큼 남았다. 게다가 원피스 말고도 아직 보지 않은 명작들이 수두룩 하다. 무엇을 읽을지 특별히 고민할 필요도 없다. 이제 나 뭐 봐야 해?라고 물어보면 그가 알아서 추천을 해주니까.
만화책뿐 아니다. 아직 보지 않은 고전 명작도 많다. 책을 사기에는 너무 많고, 도서관을 가기도 귀찮아서 주로 밀리의 서재에서 읽는다. 한국 고전은 그래도 꽤 읽었는데… 번역체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해외 고전은 읽지 않은 것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많다. 요즘 새로 나온 개정판들은 예전 같지 않아서, 번역이 많이 자연스럽다. 밀린 숙제를 해치우듯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읽어야 하는 책도 있지만. 앞으로 몇 년간. 어쩌면 평생 동안 할 일이 쌓여있어 삶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