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로드 <집행사Z>
나처럼 한 작품을 오래 쓰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장례집행사Z>는 작년에 밀리로드에 공개했다가 플랫폼과의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칼 같이 비공개로 돌려 버린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실 일부가 오래전에 브릿G에 공개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
오픈 플랫폼에 작품을 공개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편집자 추천을 받거나 공모전 수상을 하기 전에는 조회수가 1도 안 나온다. 플랫폼에 엄청나게 올라오는 작품을 일일이 까뒤집어 읽어볼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럴 시간이 있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들은 자기 시간이 소중하다. 검증 안 된 작품, 리뷰 공모도 받지 않는 작품을 전부 파뒤집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 글은 참으로 고맙게도(그때는 좌절했지만, 돌아보니 그 편이 나았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어 방치되어 있었고, 그 뒤에 대학원 문창과에 진학하면서 그 글을 비공개 처리해 버렸다.
비공개 처리한 이유는 순문학 위주의 문창과 커리큘럼 속에서 허둥대던 동안에 나는 내가 쓴 장르물들에 대해 '쪽팔린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해 쪽팔려야 마땅한 수준의 글이긴 했지만, 그때의 문제점은 내가 소재 자체에도 쪽팔림을 느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좀비'가 뭐 어때서? 약 빨고 좀비 되는 세계관이 뭐 어때서?
그런데 해당 글을 재가공해서 밀리로드에 연재하면서 다시 그 감정이 새록새록 일어났다. 아, 부끄럽다. 아니 창피하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그 괴이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나는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글을 비공개 처리해 버리고 잊어 버렸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잊고 싶었다. 제발 잊자.
그런데 장편 아이디어 몇 개를 현실화하려고 끙끙대다가 실패한 뒤에는 언제나 '그때 그 좀비물이나 제대로 끝을 낼 걸.' 하는 후회가 따라왔다. 초단편이든 단편이든 끝내는 게 중요하다고, 중간에 자꾸 뒤집지 말고 끝부터 내라고, 남들에게는 잘만 조언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실천을 못 했다는 게 정말로 쪽팔렸다.
비공개 처리했던 글을 다시 열어 보니 연재 압박에 쫓겨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써서 분량을 늘인 것들이 눈에 띄어서 싹 걷어냈다. 그리고 소제목을 다시 붙여서 재공개했다.
재공개하려고 하니 표지부터 마음에 걸렸다. 너무 과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드러나는 조금 순화된 표지를 AI 생성기에게 부탁해 보았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물들을 만들어 주었다.
오호!
이 버전에서는 무기가 마음에 든다. 내가 프롬프트에 넣은 무기를 그대로 구현해 주었다. 거대한 못 같이 생긴 창.
그런데 소설 본문은 레트로 느낌이 나는 좀비 월드인데, 이미지는 너무 세련된 느낌이라서 마음에 걸렸다. 너무 예쁜 만화체라서 피 튀기고 살 튀기는 장면보다는 러브 라인에 집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배경 도시가 유토피아스럽다. 나는 디스토피아스러운 느낌을 원하는데.
그래서 주문서를 다시 넣었다. AI야, 일 다시 해라.
좋은데, 너무 사이버펑크 느낌이다. 무기에서 광선이 나올 것 같다. 옷은 왜 연미복이냐? 약간씩 뒤틀린 건물들과 어지러운 옥상 풍경이 마음에 들지만, 나는 까다로운 고객이라 AI에게 다시 주문서를 넣었다.
아니, 이봐. 무기가 저러면 안 되지. 내가 언제 무협, 판타지풍 창을 만들어 달랬냐고. 다른 건 다 마음에 들지만 무기 끝을 지우고 빌딩 모양은 살릴 재주가 없어서 패쓰!
아니? 이게 뭐야?
생성한 것 중 제일 웃겼다. <에어리어 88>, <허리케인 조>가 생각나는 옛날 일본 애니 느낌인데?
정현의 단발 커트는 그렇다치고, 오 탄은 왜 일본도를 차고 있냐?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이걸 표지로 쓰면 어쩐지 스토리도 바뀔 것 같아서 패쓰.
오 탄과 정현이 손을 꼭 잡고 있네? 이런 건 의뢰한 적이 없는데 AI가 알아서 러브라인을 만들었어!
오. 마음에 들어.
그런데 누가 정현이 어깨에 꽂힌 창 좀 뽑아줘요. 이야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부상을 입고 있잖아요. 쟤가 주인공이란 말이에요.
결국 뽑아낸 최상의 한 컷.
오 탄이 조금 더 크고 정현이 조금 더 작았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정현이 너무 여성스러운 뒤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게 최선이다. 그리고 의뢰한 적도 없는 부랑인 두 명을 그려준 것은 센스 있었다.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야, 잘했어. 그렇지만 돈 좀 벌게 되면 미드저니를 유료로 쓰고 싶어. 미안해. 내 기대치에 니가 못 미치는 느낌이야. 하지만 공짜로 이만큼이나 그려주는 게 어디야? 그치? 이해해.
표지를 재정비하고 보니 제목도 좀 과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여백 없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목도 <집행사Z>로 바꾸었다.
이제 계속 쓰기만 하면 된다. 사실 그게 제일 문제지. 단편이든 중편이든 장편이든, 결말을 내는 게 제일 큰일이다. 결말까지 달려가는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가능하다.
깨알 같은 홍보)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순문학(혹은 순문학 냄새가 나는 SF) 장편 쓰기를 잠정 포기한 작가의 좀비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좀비물인데 좀비가 잘 안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