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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Mar 28. 2024

다시 시작하는 연재

밀리로드 <집행사Z>

나처럼 한 작품을 오래 쓰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장례집행사Z>는 작년에 밀리로드에 공개했다가 플랫폼과의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칼 같이 비공개로 돌려 버린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실 일부가 오래전에 브릿G에 공개되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 전?


오픈 플랫폼에 작품을 공개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편집자 추천을 받거나 공모전 수상을 하기 전에는 조회수가 1도 안 나온다. 플랫폼에 엄청나게 올라오는 작품을 일일이 까뒤집어 읽어볼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럴 시간이 있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심사위원이라면 모를까, 일반 독자들은 자기 시간이 소중하다. 검증 안 된 작품, 리뷰 공모도 받지 않는 작품을 전부 파뒤집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 글은 참으로 고맙게도(그때는 좌절했지만, 돌아보니 그 편이 나았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되어 방치되어 있었고, 그 뒤에 대학원 문창과에 진학하면서 그 글을 비공개 처리해 버렸다. 


비공개 처리한 이유는 순문학 위주의 문창과 커리큘럼 속에서 허둥대던 동안에 나는 내가 쓴 장르물들에 대해 '쪽팔린다'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까놓고 말해 쪽팔려야 마땅한 수준의 글이긴 했지만, 그때의 문제점은 내가 소재 자체에도 쪽팔림을 느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좀비'가 뭐 어때서? 약 빨고 좀비 되는 세계관이 뭐 어때서?


그런데 해당 글을 재가공해서 밀리로드에 연재하면서 다시 그 감정이 새록새록 일어났다. 아, 부끄럽다. 아니 창피하다.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다니. 


그 괴이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나는 계약기간이 끝나자마자 글을 비공개 처리해 버리고 잊어 버렸다.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다. 잊고 싶었다. 제발 잊자.


그런데 장편 아이디어 몇 개를 현실화하려고 끙끙대다가 실패한 뒤에는 언제나 '그때 그 좀비물이나 제대로 끝을 낼 걸.' 하는 후회가 따라왔다. 초단편이든 단편이든 끝내는 게 중요하다고, 중간에 자꾸 뒤집지 말고 끝부터 내라고, 남들에게는 잘만 조언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실천을 못 했다는 게 정말로 쪽팔렸다. 


비공개 처리했던 글을 다시 열어 보니 연재 압박에 쫓겨 허둥지둥 아무 말이나 써서 분량을 늘인 것들이 눈에 띄어서 싹 걷어냈다. 그리고 소제목을 다시 붙여서 재공개했다. 


재공개하려고 하니 표지부터 마음에 걸렸다. 너무 과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드러나는 조금 순화된 표지를 AI 생성기에게 부탁해 보았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결과물들을 만들어 주었다. 


Bing Image Creator


오호!

이 버전에서는 무기가 마음에 든다. 내가 프롬프트에 넣은 무기를 그대로 구현해 주었다. 거대한 못 같이 생긴 창.

그런데 소설 본문은 레트로 느낌이 나는 좀비 월드인데, 이미지는 너무 세련된 느낌이라서 마음에 걸렸다. 너무 예쁜 만화체라서 피 튀기고 살 튀기는 장면보다는 러브 라인에 집중해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배경 도시가 유토피아스럽다. 나는 디스토피아스러운 느낌을 원하는데.

그래서 주문서를 다시 넣었다. AI야, 일 다시 해라.  


Bing Image Creator


좋은데, 너무 사이버펑크 느낌이다. 무기에서 광선이 나올 것 같다. 옷은 왜 연미복이냐? 약간씩 뒤틀린 건물들과 어지러운 옥상 풍경이 마음에 들지만, 나는 까다로운 고객이라 AI에게 다시 주문서를 넣었다. 


Bing Image Creator


아니, 이봐. 무기가 저러면 안 되지. 내가 언제 무협, 판타지풍 창을 만들어 달랬냐고. 다른 건 다 마음에 들지만 무기 끝을 지우고 빌딩 모양은 살릴 재주가 없어서 패쓰!


Bing Image Creator


아니? 이게 뭐야?

생성한 것 중 제일 웃겼다. <에어리어 88>, <허리케인 조>가 생각나는 옛날 일본 애니 느낌인데? 

정현의 단발 커트는 그렇다치고, 오 탄은 왜 일본도를 차고 있냐?

그림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이걸 표지로 쓰면 어쩐지 스토리도 바뀔 것 같아서 패쓰.



Bing Image Creator


오 탄과 정현이 손을 꼭 잡고 있네? 이런 건 의뢰한 적이 없는데 AI가 알아서 러브라인을 만들었어! 

오. 마음에 들어. 

그런데 누가 정현이 어깨에 꽂힌 창 좀 뽑아줘요. 이야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부상을 입고 있잖아요. 쟤가 주인공이란 말이에요. 




결국 뽑아낸 최상의 한 컷.


오 탄이 조금 더 크고 정현이 조금 더 작았으면 좋겠지만, 그리고 정현이 너무 여성스러운 뒤태를 가지고 있지만, 이게 최선이다. 그리고 의뢰한 적도 없는 부랑인 명을 그려준 것은 센스 있었다.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야, 잘했어. 그렇지만 돈 좀 벌게 되면 미드저니를 유료로 쓰고 싶어. 미안해. 내 기대치에 니가 못 미치는 느낌이야. 하지만 공짜로 이만큼이나 그려주는 게 어디야? 그치? 이해해.


표지를 재정비하고 보니 제목도 좀 과한 느낌이었다. 어쩐지 여백 없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목도 <집행사Z>로 바꾸었다. 


이제 계속 쓰기만 하면 된다. 사실 그게 제일 문제지. 단편이든 중편이든 장편이든, 결말을 내는 게 제일 큰일이다. 결말까지 달려가는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아야 가능하다. 



깨알 같은 홍보) 

아래 링크로 들어가시면 순문학(혹은 순문학 냄새가 나는 SF) 장편 쓰기를 잠정 포기한 작가의 좀비물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좀비물인데 좀비가 잘 안 나와.....)


https://millie.page.link/V1C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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