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살아가기
여름이 되면 파리라는 도시는 거대한 테라스로 변하는데 아스팔트를 데우는 열기에 지친 나는 오랫만에 모처럼 지인들과의 술자리에 합석했다. 사회적 거리는 고사하고 사생활 거리도 지켜지지 않는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처음 보는 친구의 친구가 와인잔을 흔들며 '그나저나 너는 하는 일이 뭐야?' 라고 물어 온다. 의사니 변호사 건축가처럼 직업을 이르는 명사들은 참 다양하고 많은데 그 어느 것도 내가 하는 일을 뽀족하게 한 단어로 설명할 길이 없다.
또 한번은 건축가 친구 알리스 동료 건축가가 사무실에 들른 적이 있었다. 사무실을 같이 쓰는 친구들 이름을 소개하며 일일이 소개하는데, 내 차례가 되자 "음.. 효는 빈티지 오브제를 판매하는데, 잡지에 글도 쓰고, 게다가 통역일도 하고.." 등등 지나치게 늘어지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저 내가 나서서 "그 정도면 됐다고" 정리하곤 한다. 알았다며 끄덕이는 그 동료의 얼굴에는 놀랍다는 것인지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인지 복잡한 표정이 서려있다.
한국의 정서상 한 우물만 열심히 판 사람은, 늘 인정을 받는다. 한 회사에서 10년을 몸 담아 일하고 오로지 한 가지 일만 해온 사람들. 어디에도 한눈팔지 않고 외길을 묵묵하게 걸어온 이들. 1200도가 훌쩍 넘어가는 장작 가마를 때며 35년 동안 도자기를 구워온 이들, 한 회사에서 은퇴할 때 까지 일하는 oo 맨까지...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부지런히 노력하여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되어온 장인을 보면 그 긴 시간 동안 지겹다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없었을까 궁금해진다.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질투하는 미운 마음은 더욱 아니다. 인터넷을 열면 직업별 정보가 넘쳐나고, 이웃을 보면 그들이 하는 일이 어쩐지 더 쉬워 보이는 탓이다.
오직 하나의 오브제에 물건의 주인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보람 있다. 아띠끄 파리를 운영하면서 오브제에 담긴 '숨'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한 물건이 다시 숨을 쉰다는 것이 어쩌면 어불성설로 보일 수도 있다. 생명이 없는 그저 한 물건에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냐 비난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사랑받고 소중하게 오랜 시간을 담은 물건은 귀한 티가 난다. 집도 자주 쓸고 닦고 거주하는 이가 있어야 유지되어 쉽게 낡지 않기에 예부터 어른들이 집에는 모로 사람이 살아야 한다 했다. 마음에 꼭 들어 자주 사용한다는 내 친구의 은 귀걸이에는 녹이 덜 슨다. 나는 오랫동안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던 이 물건들이 아낌없이 사용되고 새로운 숨을 쉬게 되는 그 순간을 위해 일한다.
잡지에 글을 쓰게 된 이야기는 이미 일전에서 했으니 이번에는 통역을 하게 된 연유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열이 높다 못해 뜨거운 엄마 덕분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집으로 매주 방문하시는 눈높이 선생님이 숙제를 잘했을 때마다 붙여주시는 포도알을 채우고 싶은 초등학생의 단순한 욕심으로 시작한 영어였다. 한 포도당 30알 정도 되려나,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면 포만감과 비슷한 만족감이 차올랐다. 일찍 언어에 눈을 떴고 적성에 맞았다.
프랑스어가 좋았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쉽게 늘었다. 처음 어학연수를 할 때부터 고급반으로 들어갔기에 대학원 수업은 쉬울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첫 노동법 수업은 단 20%도 이해하지 못했다. 악에 차서 모든 수업을 녹음하고 다시 들으면서 온전히 불어로만 논문을 쓰고 대학원을 마쳤다. 10년 살았으니 이제는 불어가 편할 때도 있고 가끔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 집 넷플릭스 시리즈는 오디오는 영어이고 자막은 불어로 설정되어 있다. 우스운 것은 처음엔 둘 다 이해가 가지 않아 시리즈를 보다가 몇 개나 그만뒀고 그중에 인생 미드 파고 (Fargo)도 있었다.
통역과 번역은 내가 배우지 못했던 분야를 짧은 시간에 깊게 배울 수 있게 해 주고 그 분야에 오래 일한 전문가들과도 만날 기회가 주어진다. 20년 넘게 VR (Virtual Reality) 기술만 연구하셨다는 교수님은 내 프랑스어를 부러워하셨지만 나는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 수많은 계절을 지나오면서도 흔들림 없이 한 길을 가시는 그분의 끈기에 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