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나 있는 '기쁨의 발견 JOY'를 읽고
기쁨은 말이야.
아침 햇살이 발가락을 간지럽힐 때 전해지는
따사롭고 짜릿한 기분이야.
기쁨이란, 엉뚱한 장난을 할 때
키득키득하고 쿨렁쿨렁한 그런 기분이지.
달라이 라마와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한 마디씩 나눈 말씀으로, 라파엘 로페스가 그림을 그려 빚은 책 <기쁨의 발견 JOY>에 담겼다. 이 책을 동무들과 어울려 연주했다. 나라 곳곳에 꼬마평화도서관을 여는 모임인 ‘꼬마평화도서관사람들’에서는 여럿이 모여 그림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목소리 연주라고 한다.
소리 내어 읽으면 눈으로 볼 때와는 달리, 책에 있는 얼거리가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박힌다. 문제를 풀지 못해 쩔쩔매던 아이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문제를 읽어주기만 했는데 바로 풀더라는 얘기를 어떤 수학 선생님에게 들었다. 무슨 말씀인가? 말에 익어있던 머리가 눈으로만 쓱 훑고 말았으니 뭘 묻고 있는지 몰라 갸웃거리다가 소리를 듣고서야 묻는 까닭을 바로 알아차렸다는 말이다. 책을 소리 내어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림책 <기쁨의 발견 JOY>는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와 달라이 라마가 이레 동안 나눈 ‘기쁨’ 이야기 가운데서 고갱이만 걸러 내어 빚은 책이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와 달라이 라마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티베트, 아주 멀리 떨어진 데서 태어났다. 두 아이는 떨어진 거리만큼 처지도 달랐다. 한 아이는 아주 작은 집에서 살고 또 다른 아이는 아주 커다란 궁궐에서 살았다. 매우 다르게 자란 두 사람은 입 모아 “기쁨은 어디에나 있다!”라며 우리를 흔든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네 기쁨이 씻겨 내려갈 때에도
기쁨은 발 아래 웅덩이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이 말씀은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나누는 말씀인데, 비가 와서 야자수잎을 머리에 얹고 앉아 있는 아이 발 아래 웅덩이에 비친 아이는 덩실덩실 춤춘다. 마음에 한 번 들어오면, 마법처럼 더 많은 기쁨이 들어오도록 언제나 자리를 만든다는 기쁨은 아픔을 따라 들어오기도 한단다는 대목을 연주하다가 유기견으로 인연이 닿아 우리 집에 와서 열두 해를 같이 살다가 지난해 11월 빼빼로 데이에 세상을 떠난 바니가 떠올랐다.
심장사상충을 앓는 개인데 이레 안에 누가 데려가지 않으면 죽인다는 말을 들었다. 죽인다는 소리에 개를 기른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보지 않았던 우리 부부가 개와 함께 살게 되었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데려오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테다. 목숨을 거두는 일이 가볍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듣지 않았으면 몰라도 산목숨이 억지로 끊어진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모른 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품은 개는 여섯 살쯤 되었다는 말티즈였다.
하얀 털에 동그란 눈이 마치 토끼 같다며 딸아이가 바니라고 이름을 지었다. 잔정이 없는 사람들과 살았는지 공을 비롯해 장난감을 이것저것 가져다줘도 가지고 놀 줄 몰랐다. 구박도 받았는지 손이 머리께로 갈라치면 심하게 움찔거렸다. 움츠리며 눈치를 보던 바니가 하루 이틀 지나면서 스스럼이 없어지더니 이불에 올라와 함께 잘 만큼 가까워졌다. 바니와 같이 살기 전에는 어째서 개와 한 침대에서 구르는 사람들을 헤아리지 못했는데…, ‘알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아, 사람들이 이래서 개와 함께 사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면서 ‘개도 사람 못지않게 슬픔이나 기쁨을 느끼고 가까운 이한테는 그 느낌을 숨김없이 드러내는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아내는 유기견이던 바니가 홀로 남는 두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라면서 혼자 두고는 나들이도 하지 않았다. 개나 고양이 또는 병아리를 안았을 때 뜨뜻하고 뭉클한 느낌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바니를 찾아 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죽음이라는 견줄 수 없는 아픔이 맺어준 바니는 우리에게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적잖이 안겨줬다. 우리 곁을 떠난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함께 나눈 기쁨은 여태 남아 우리를 따사롭게 한다.
사람들은 다 아픔을 싫어한다. 그래도 엄마는 아기를 낳으려면 엄청나게 아플 줄 알면서도 기꺼이 아픔을 견디며 아기를 낳아 커다란 기쁨을 얻는다. 아기를 보살피기도 죽을 만큼 힘든 데,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고단함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아기 머리맡에 밤새도록 앉아 있다가 아기가 나으면 반가워하며 기쁨을 누린다. 이토록 기꺼이 맞는 아픔은 괴로움을 넘어선 기꺼움이다.
어른들이 읽도록 빚은 또 다른 <JOY 기쁨의 발견>에서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나눈, 아픔을 따라 들어오는 기쁨 결을 떠오르는 대로 적었다. 아플 걸 뻔히 알면서도 아픔을 견디겠다고 나선 기꺼운 마음은 남자들은 느낄 수 없는 엄마다움이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이들은 아픔을 겪으면 슬픔에 빠져 가슴이 쿵쾅거리고 제정신을 잃어 몸과 마음이 다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픔에서 비켜설 수는 없을지라도 괴로워할지 말지는 스스로 고를 수 있다. 우리(인도로 망명한 티베트 사람들)는 나라를 잃고 난민이 되었으나 포탈라궁에만 머물렀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책에서 달라이 라마가 나눈, 아픔을 따라 들어오는 기쁨 결 또한 생각나는 대로 적바림했다. 불교에서는 바깥에서 주어진 아픔, 첫 번째 화살은 어쩔 수 없이 맞을 수밖에 없으나 그 아픔에 빠져 괴로워하는 두 번째 화살에서는 얼마든지 비켜설 수 있다고 흔든다. 그런데 달라이 라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픔을 겪는 가운데서도 기쁨을 얻을 수 있단다. 두 분이 나눈 기쁨 결은 다 마음을 달리하면 어떤 데서도 기쁨을 길어 올릴 수 있다는 흔드심이다.
언제 어디서나 기쁨을 찾을 수 있어서 그럴까? 앞뚜껑에 어울린 아이들도 나무도 너울너울 춤춘다. 이 그림들만 보고 있어도 키득키득 쿨렁쿨렁 신바람이 절로 난다. “찾았다, 기쁨!” 그림책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기쁨이다. <기쁨의 발견 JOY>, 동무들과 마음 겯고 함께 하여 더 맛있다.
기쁘다는 말이 어디서 왔을까? 기쁘다는 ‘깃+브다’로 깃은 보금자리를 가리킨다. 집도 본디 깃이었는데 ‘ㄱ’과 ‘ㅈ’가 오가면서 집이 되었단다. ‘브다’는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기쁨은 어수선한 바깥에 있다가 푸근한 집에 들어오니 마음이 놓이며 넉넉해지는 것과 같아 좋다는 뜻을 담은 말인데, <기쁨의 발견 JOY>에서 드러낸 기쁨은 한결 더 설레고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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