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에 대한 예민함을 내려놓자.
일을 하다가 힘들 때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순수한 자아실현, 혹은 행복추구 등 그 이상을 원하여 일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한다.
지금 일하고 있는 내 모습도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그 기본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할 때 내가 왜 이일을 하고 있는지 자괴감이 들며 다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보, 당신이 보기에 당신 부인은 어떤 점이 제일 예민한 것 같아?"
남편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말했다.
"배고픈 거"
맞다. 나는 배고픈 것에 무척 예민하다. 먹는 양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공복이 되면 견디기가 힘들다. 친가 쪽으로 당뇨 내력이 있어서 그런지 나도 당에 무척 예민하다. 공복이 길어지고 당수치가 조금만 떨어져도 손이 떨리고 어지럽다. 그렇다 해도 어릴 때부터 원래 먹는 것을 좋아하지도, 예민하지도 않았었다. 아마도 끼니에 예민해진 것은 내 직업 때문일지도 모른다.
'간호사'
하루종일 화장실 갈 틈도 없어서 방광염을 달고 살아야 하고, 밥 먹을 시간조차 내기 힘든 직업 중 하나.
그중에서 힘들다고 소문난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그게 나의 첫 직업이었다.
중환자실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원래도 바쁘지만 식사시간만 되면 유독 더 바빠졌다.
Day 근무 때는 근무인력이 많으니 돌아가면서 잠시라도 밥을 먹을 수 있지만 Evening 근무 때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일하던 중환자실은 저녁시간이면 수술 후 회복실의 기능까지 해야 하는 곳이었다. 저녁 식사시간에 수술 환자가 연달아 나오기 시작하면 저녁밥을 못 먹는 경우가 많았다.
밥이라고 해봤자 병동으로 배달 온 도시락이 전부인데, 어떨 땐 그마저도 먹다가 뛰어나갈 때가 많았다.
모처럼 여유가 있는 날이라 해도, 만약 같이 일하는 선배 간호사가
밥맛이 없다고 밥을 먹을 생각을 안 한다던지,
너네끼리라도 밥을 먹어~라는 말을 안 한다던지,
이도 저도 아니고 내가 바쁜데 지금 밥 먹게 생겼냐라고 한다면 그날은 밥을 못 먹는 날이었다.
(진짜 이런 사람이 있냐고 묻지 마라. 진짜 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끼니 시간이 되었는데 밥을 못 먹으면 점점 예민해진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밥을 제때 못 먹으니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일하고 돈을 번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그런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후 내가 일반병동으로 옮기고, 연차가 쌓여 책임간호사가 되었을 때는 그 무엇보다 후배간호사들이 제때 밥을 먹고 올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적어도 내 기억은 이렇다...)
그 사실을 모르던 남편과, 끼니에 예민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전의 내가 크게 다툰 적이 있다.
결혼 후 1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남편과 모처럼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하던 날이었다. 장소는 마침 남편이 군 복무를 하던 지역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군 복무 시절 자신의 추억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그에게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
언제까지 군대 이야기만 할 거냐며 식당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화를 쏟아냈다.
도대체 왜 밥을 조금 늦게 먹는다고 이렇게 화를 내고 예민하냐며 황당해하는 남편과 배가 고파 그런다며 밥 좀 먹자는 나는 결국 한적한 길에 차를 세우고 서로 언성을 높이며 다퉜다.
지금은 남편도 나도 잘 안다. 내가 밥시간에 엄. 청. 예민하다는 사실을.
학교에서도 식사시간 확보가 중요하다.
보통 보건실에는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가장 많이 오기 때문에 4교시 수업 시간이 보건교사의 점심시간이다. 그러나 선생님이야 식사를 하건 말건, 수업 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는 아이들 때문에 항상 같은 시간에 식사를 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밥을 먹기 위해 보건실 문을 잠그고 나서자마자 아파서 쉬고 싶다고 찾아오는 애들을 매번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밥을 먹으러 교내 식당에 갔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자신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제일 급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식사시간 따위는 배려해 주지 않는다. 밥을 한 숟갈 뜨자마자 나를 찾는 아이 때문에 수저를 내려두고 나와야 하는 경우가 수시로 있다. 다시 중단된 식사를 이어가기 위해 식당으로 돌아오지만 나를 기다리는 건 차갑게 식은 식판뿐이다.
어디 꼭 밥시간 때만 그러겠는가.
중학교 근무시절, 끊임없이 몰려오던 애들이 다 물러간 시간 급한 용무를 해결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하다 보면 어느새 저쪽에서 '선생님~'하고 찾아오는 애들 때문에 다시 보건실로 돌아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렇다고 아픈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틈나는 대로 시간을 쪼개서 5분 ~10분이라도 용무를 해결하고 식사도 하고 와야 한다.
보건실 문에는 다음과 같은 쪽지들을 붙여두고 후다닥 다녀오는 수밖에 없다.
교직원식당에서 식사 후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내 얼굴이 보이자마자 운동장에서부터 줄줄이 따라오며 '쌤, 저 아파요.', '쌤, 저 다쳤어요.'. '쌤, 목말라요.' 하며 쫓아왔다. 이때는 식사를 한 뒤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으이그. 너네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구나. 자. 가자! 보건실로~"라 말하며 아이들을 끌고 보건실로 간다. 밥을 먹고 숨 돌릴 시간도 없이 다시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그래도 더 이상 예전만큼 예민하거나, 화가 난다던가 억울하진 않다.
게다가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근무 중인데, 고등학생들은 선생님의 끼니를 걱정해 주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는 만큼 자신만 알던 학생들도 상대방을 조금씩 생각하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이 들어서나 보다.
어느 날 4교시에 보건실 요양을 해야 하는 한 학생이
"저 때문에 선생님께서 식사를 못하셔서 어떻게 해요?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선생님을 생각해 주는 그 아이의 말이 무척 고마웠다.
그 말 한마디가 그날 내가 제시간에 밥을 먹지 못해도 보건실을 지키고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나는 바로 이렇게 답했다.
"죄송할게 뭐 있어. 이게 내가 할 일인데. 아픈 애들 오면 당연히 지켜보고 치료해 줘야지 "
앞으로도 제시간에 식사를 하지 못할 일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간호사 때처럼 수시로 못 먹지는 않으니까.
또 얼마나 다행인가. 당장 병원에 후송해야 할 정도의 초 응급상황은 아니니까.
그리고 또 얼마나 다행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이 일을 좋아하고 있으니.
이깟 한 끼 제시간에 못 먹는다고 투덜거리지 말자.
며칠을 굶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예민함을 조금 내려놓자.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내가 하는 일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로 만들고 말고는 나에게 달려있다.
세상일이라는 게 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보건실 이야기.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