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는 비우고, 숨은 채우고

괜찮아, 오늘의 너도

by 시원시원

오늘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며칠 전부터 아내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입한 '집 정리의 날'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새벽 기상에서 벗어나 7시에 눈을 떴지만,

평소보다 두 시간 늦게 일어났다는 게 무색하게, 정신은 이미 전투태세였다.


아침 세수도 대충 하고 곧장 현관문 옆 창고로 향했다.

문을 열자, 우르르 박스더미가 쏟아질 듯 나를 반겼다.
“이건 뭐, 택배 상자 전시회도 아니고…”

일주일 치 누적된 박스들.
매번 “그때그때 치우자” 다짐했건만, 늘 그렇듯 이번에도 “이번만”이라며 쌓여갔다.

30분 남짓 씨름 끝에 드디어 ‘공간’이라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관 앞에 분리수거용 박스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마치 “이만큼 정리했소” 하고 외치는 듯한 마음으로 창고를 닫았다.

내일이 분리수거 날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이 타이밍 아니었으면 창고는 평생 창고였을 것이다.


이쯤 되니 식구들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익숙한 속도로 아침밥을 차렸고, 나는 그 속도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다.

오늘은 가족 전체가 움직이는 정리의 날이다.
물론, 아내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원칙이다.

우리는 각자 담당 구역을 부여받았다.
나는 베란다와 거실, 아내는 주방, 아이들은 자기 방.

아내는 어느새 가족이라는 작은 회사를 움직이는 CEO가 되어 있었다.
CEO의 지시는 간단했다.
“나중에 쓸 거면, 지금 버려.”

그리고 그 말 한마디는 나의 ‘보관욕’이라는 악마를 0.5초 만에 퇴치시켰다.


3시간 후, 100리터 쓰레기봉투가 가득 찼다.

그것도 분리수거하고도 남은 것들이다.

예전에 유튜브 하겠다고 산 마이크,

‘언젠가 입겠지’ 했던 코트,
딱 한 번 입고는 봉인된 바지,
자기 계발의 꿈과 함께 사라진 노트북 받침대...

그 시절의 나는, 그 물건이 없으면 인생이 멈출 것 같았는데,
지금의 나는 그것들이 방해물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아직 쓸 수 있지만, 지금 쓰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쓰레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정리는 버림의 기술이다”


정리는 단지 물건을 ‘잘 넣는’ 일이 아니었다.
버림으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었고,
그 공간은 생각과 감정이 쉴 틈이 생기는 여백이다.


우리는 사는 데에는 너그러우면서,
버리는 데는 너무 인색하다.
‘나중에’라는 단어가 주는 위로는 달콤하지만, 집안은 점점 숨 막혀 간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과감히 그 ‘나중에’를 버렸다.


버리고 나니, 가구 배치만 바꿨을 뿐인데도
집 분위기가 달라졌다.
햇살도, 소파도,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마치 새로 오픈한 카페의 창가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노동의 보상이다.


하지만 정리의 여운에 취한 것도 잠시,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계획했던 달리기는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이러다 못 나가겠다.”

결국, 10초 안에 몸을 일으켜야겠다는 다짐으로 억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여름 내내 입지 않았던 반바지 레깅스는 낯설었고,
오늘의 코스는 더 낯설었다.
보상의 장소, 스타벅스.
약 집에서 4.3km 거리. 적당한 도전이었다.


1km쯤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불과 몇 달 전엔 10km도 가볍게 달렸는데,
벌크업을 핑계로 쉬었던 결과는
‘심폐패망’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가을을 가장한 여름.
호흡을 가다듬고,
목적지를 상상하며,
다시 내 발에 집중했다.
들숨과 날숨,
그리고 스벅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고통과 보상사이에 나는 달렸다.


스타벅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세상에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앉을자리는커녕 숨 쉴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주문대에서 직원이 물었다.
“자리는 있으신가요?”

그 말속 의미는
‘없으면 테이크아웃 하시죠’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 순간, 운명처럼 긴 테이블 한 자리가 비었다.
점원에게 손짓하며 “거기요” 하고 눈빛 보냈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앉아있는 내 주변엔

누군가의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서 있었다.
나는 테이블의 중앙,
고요히 기다리는 시선,
'동물원 우리 안'에 있는 기분.
‘보상의 공간’은
‘인내의 공간’이 되었다.


20분 후,
드디어 내 이름이 불렸다.
“거대한 기적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티라미수 나왔습니다.”

손끝에 전해지는 찬 기운과
작은 포크 옆에 놓인 하얀 접시.
오늘 하루의 보상 같은 비주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첫 포크질을 했고,
티라미수를 입에 넣는 순간-
아, 이상했다.
분명히 달콤한 맛일 텐데,
혀끝에서 뇌로 전해지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아도 마찬가지였다.
쓰고 시원한 맛이 입 안을 휙 스쳐 지나가더니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냥 물 같았다.
물보다 못한 물.


‘왜 이럴까?’

너무 지쳐서였을까.
몸이 달콤함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던 걸까.
혹은,
등 뒤에 앉을자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미묘한 기운이
내 혀를 마비시켰던 걸까.

맛이라는 것은 혀로만 느끼는 게 아니 가보다.

상황, 감정, 타인의 눈빛까지도 한몫을 한다는 걸,
오늘은 뼈저리게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은 꽤 괜찮은 하루였다.

창고도 정리했고,
그보다 더 무거웠던 ‘미뤄뒀던 마음’도 함께 비워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하루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작은 혁명이 일어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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