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을 하는 이유

어른의 사춘기

by 시원시원



© tjerwin, 출처 Unsplash


어른의 사춘기가 찾아와 감정에 휘둘렸을 때 나에겐 여유란 없었다.

하루 24시간 일하는 것도 아닌데 여유의 공간에 자책과 걱정을 채우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점점 모든 일에 게을러지고 귀찮아 미루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은 쌓이고 문제도 같이 쌓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몸과 마음의 동요가 폭발하기에 이르렀을 때

예전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산행해보지 않을래"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산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산행은 좀처럼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산행이 아니라 내가 산행을 받아들이지 않을 터였다.

아침에 일찍 기상을 해도 미적거리는 통에 시간을 빠르게 흘러갔다.

결국 난 그날 산행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에도 그랬다.


문제는 산행이 아니었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

그때부터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것이 내 목표가 되었다.


며칠 동안 집 밖을 나가기를 실패하고 드디어 처음 현관에 신발을 신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올라오는 숫자를 보고 있으니 참 별것도 아닌 것에 이리도 오래 걸렸던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내 의지가 박약하다니...

잠깐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였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새벽이라 찬 공기가 아직 잠에서 덜 깬 나를 깨웠다.

어둑해진 새벽하늘의 공간에 산을 향해 걸었다.

한발 한발 걷다 보니 어느새 산의 입구에 도달했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니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던 나무들도 풀도 바람에 펄럭이는 나뭇잎과 갖가지 소리들이 조금 무서웠다.

난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집으로 향했다.

그러니 원래 목표를 넘어선 나에게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며칠 동안은 산 입구에만 갔다 왔다.

그리고 조금 마음에 불안이 덜 하는 날에 처음으로 산 입구에서 한 발짝 내디뎠다.

그 한 발작이 산의 중턱까지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산행이 시작되었다.


처음 산행을 할 때는 땅만 보며 걸었다.

어둑해진 환경 탓에 조금 무서움 때문이었다.

숲 속에서 이상한 소리만 들려도 덜컥 심장이 오그라 들었다.

남자 체면에 애써 괜찮은 척해보았지만

그런 나를 본 산은 이따금 큰 소리로 놀라게 했다.

중턱에 올라가자 날이 점점 밝아왔다.

그제야 주위를 살폈다.

길옆에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바람을 타고 새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왔다.

잠시 동안이지만 아무것도 내 마음속에 없었다.

걱정도, 기쁨도, 자책도 말이다.

그저 평안하기만 했다.


산행을 한지 석 달이 지났다.

이제는 꿈틀이는 나에게 없다.

이불을 시원하게 걷어차고 현관문을 박차고 엘리베이터 버튼은 과감히 누르며

산행 입구에서 되돌아가는 일도 없고

바닥을 향해 걷지도, 산이 장난하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못 보던 풀과 꽃 그리고 나무들의 발견에 오히려 내 시선을 담았다.


내가 산행을 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득 차 있는 자책과 걱정에 산행의 시간만큼은 잠시나마 마음의 공간이 나를 치유해주었다.

어른의 사춘기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온 것들로부터 산행은 여유를 주었다.

여유가 생기는 점점 감정의 동요와 기복은 잦아들었다.

완벽하게 없어지지 않았지만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그걸로 족했다.

그걸로 괜찮았다.

그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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