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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Apr 21. 2023

싱어송라이터로 취업을 했다.

그리고 열 달만에 그만두었다.

  '싱어송라이터'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취업'이었다. 나는 북콘서트를 만드는 회사에 내용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담아 , 곡을 했다. 그리고 무대  곡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타인의 이야기부터 시작는 작업 생각보다 훨씬  있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에 음악까지 혼자서 더하였던 예전의 작업과는 또 달랐다. 나는 협업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작가님께서는 나를 전혀 모르셨을 테고, 훗날 누군가 본인의 이야기로 음악을 만들게 되리라는 사실조차 모르셨을 테지만. 그러니까 어쩌면 '협업'이라부를 수 작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협업으로부터의 성취감을 느꼈다. 홀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홀로 머물렀던 지난날들과는 전혀 다른 들이 펼쳐. 나는 누군가의 세계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무대 위에 서는 순간에는 그 세계를 같이 그려내는 구성원이 되다. 나는 비로소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도달한 것같았다. 무대에 서면 언제나 관객들과 만나게 된다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적을 때면 열 명 남짓한, 많을 때면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내가 함께 그려낸 세계를 즐겨주었다.


  남몰래 협업의 성취감을  나는, 공연 전후로 작가님을 만나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긴장을 하곤 했다. 공기관으로부터 예산을 받아 북콘서트를 열 수 있 작가님들은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작품성을 인정받으신 분들이었다. 멋지게 완성되어 있는 그들의 세계 속, 색칠공부를 하겠다며 크레파스를 들고 난입한 아이처럼 보이면 어쩌지. 나는 두려웠다. 그러나 인사치레일지라도, 대부분의 작가님들께서는 관대한 마음으로 나의 작업을 좋아해 주셨다. 북콘서트에 계속 참여하고 싶었던 나는, 그래서 그냥 뻔뻔해지기로 했다. 작가님들께서 건네주 몇 마디의 긍정적인 감상을 수십 번씩 곱씹으며 겸연쩍은 마음을 애써 밀어냈다.






  이토록 매력적인 새로운 세계 속에서 마음껏 음악을 하며 까지 벌게 되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그러나 나는 겨우 몇 달 만에, 사를 고민게 되었. 처음에 고민이 생겼던 이유는 운영 시스템 면에서 납득할 수 없는 부분들이 보여서였다. '설마 이러저러하게 운영되고 있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심들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한 이성적인 대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은 그 답을 찾아내기도 전에 아주 감정적인 상태로, 나는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통계으로도 퇴사의 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간관계라고는 하지만 내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업무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해야 하는 상사가 견딜 수 없게 싫어진 거다. 하지만 고작 한 사람에 대한 감정을 가장 큰 이유로, 책을 읽고 음악을 만들며 무대에 서는 일을 포기하기엔 억울했다. 나일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을 상쇄해 보려고 노력했다.


  러나 한번 시작된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가기만 했다. 끝내는 그 상사를, 살면서 만나본 인간 중 가장 혐오스러운 인간으로 꼽을 지경이 되었다.  상사와는, 하필 같은 동네에 살았다. 그래서 대중교통으로 같이 집에 돌아가게 되는 날이 종종 있었다. 날도 나란히 지하철에 앉아서 집에 돌아가있는 길이었다. 딱히 무슨 말을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문득 옆의 존재감이 인식되자 갑자기 역겨움이 치밀었다. 아직 내릴 역이 되지도 않았 나는 입을 가리고 울면서 지하철 칸에서 나갔다. 그리고 역의 화장실에 도착을 하기도 전에 계단에 토하고 말다. 


  부정적인 감정이 누적되는 동안 대 위에서의 내 목소리는 개미만 해져 있었다.  어쩐지 숨을 쉬기가 어려운 기분이서, 겨우 그만한 소리를 내고 있는 주제에 한두 마디에 한 번씩은 숨을 쉬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속삭이듯 불러도 어울리는 곡들을 들었으며 대에 설 때면 보컬에 리버브 효과를 잔뜩 넣어서 나의 상태를 숨겼다. 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음악과 무대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짝사랑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학생을 좋아하는 오타쿠 여중생의 마음이 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음악과 무대에 대한 애정에 비례하여 그것을 대하는 나의 행동은 더욱 뻣뻣하고 어색해져만 갔다.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 주변을 맴돌았다. 그래도 경험반복되다 보면 나의 긴장감 조금 무뎌지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안정감까지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연한 기대감에, 나는 어떻게든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런데 어느 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창작곡을 부르면서는 일종의 공황 증상을 느꼈다. 나는 그 노래를 전혀 다른 음정으로, 거의 새로 짓다시피 불렀다. 객들은 처음 듣는 노래으므로 크게 이상하게 느끼지는 않았던 양이지만 정말 청난 대형사고였다. 그만두어야겠다는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냈다. 하지만 아마 회사에서도 더는 나를 감당할 수 없겠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래도 나는 그곳에서 많은 걸 배웠다. 작곡을 하고 무대에 서는 경험 못지않게, 작은 공연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시스템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큰 경험이었다. 게다가 드디어 내가 꿈꾸었던 대로, 명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와 음악을 창작하며 먹고살 수 있는 시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공연팀을 직접 만들어서 영하고 싶다  가지게 되었다. 나의 강박적인 성향에 맞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거리낄 것 없이 음 편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고 싶었다. 또 러면서는 돈을 덜 벌게 되더라도 작업 면에서 더 만족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미 전체적인 프로그램의 기획도 맡아서 했던 적이 몇 번 있었으므로, 회사에 있을 때와 같 공연을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업자를 낸다 해도 누가 그걸 알고서 공연 의뢰를 해줄리는 없었다. 또 당장에 비슷한 작업을 한다면 그 결과물은 어차피 전 회사를 다닐 때 만들어냈던 것과 비슷한 수준에 그칠 것 같았다. 그렇게 아류처럼 시장에 등장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내실을 충분히 다져서 나만의 스타일 찾은 후에 새로운 공연팀의 운영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다시, 관객이 한 자릿수이거나 아예 없곤 했던 홍대 앞 클럽 무대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들과 함께 하고 싶어졌다. 나는 비로소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눈을 .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좋아할 수 있 이들로 내 주변을 채워보고 싶다.


  '공연팀'이라는 특성상 좋은 분위기가 유지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무대 위에 선 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기운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곤 했다. 진지하고 감성적인 무대도 나는 좋아지만, 소규모의 찾아가는 공연 무대에 주로  거라면 가장 밑바탕에는 행복하고 신나는 기분이 깔려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내가 평소에도 꽤나 그런 기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모습이 당장은 상상도 되지 않았으나, 꿈을 꾸는 건 자유였다. 나는 밴드 멤버를 찾아 나섰다.


(다음 편에 계속)


회사에서의 마지막 공연 날. 리허설 중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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