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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Apr 13. 2023

가출은 끝났다. 2년 만에.

저는 출가를 한 거였지만 말입니다.

  내가 119 차량에 실려 병원에 가게 된 것은 하필 어버이날이었다. 나는 본가에 가기 위해 방음부스를 나섰던 참이었다. 딱히 어버이날을 챙기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휴일마다는 가끔 본가에 들러 부모님도 뵙고 빨래도 해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잡은 일정과 어버이날이 우연히 겹쳤던 것뿐이다.


  본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약 두 시간 정도가 걸다. 어차피 본가에 가면 먹을 게 많을 테니 아침은 그냥 굶은 채로 출발했다. 그런데 역 근처에 도착하니 조금 어지러다. 공복시간이 길어진 가운데 아침에 생리까지 시작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하철 타기 전에 뭐라도 간단히 먹어둬야겠다 싶어 편의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척이나 낯선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편의점의 삭막한 철제 선반 위에 각종 카네이션들이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분명 생화임에도 어쩐지 조화처럼 보였다. 하나도 예쁘지가 않았다. 마치 복제품처럼 똑같은 상품들이 줄줄이 놓여있는 장면은 조금 징그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문득, 어버이날에 빈 손으로 간다면 내가 아주 궁상맞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은 생일이나 그 밖의 모든 기념일들에 선물을 챙기는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으므로, 갑자기  사가는 게 더 이상할 일이었는데 말이다. 자격지심 그렇게 판단력을 흐놓았다.


  교통카드와 현금 오천 원만 들고 나왔던 나는, 그래서 가를 먹는 걸 포기하고 마음에 들지도 않는 카네이션 바구니 하나 샀다. 어차피 예쁜  하나도 없으니 고르는 것도 금방이었다. 한 송이 짜리는 너무 저렴해 보이니까 그래도 바구니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중 제일 저렴한 게 마침 오천 원이었다.


  싸구려 티가 풀풀 나는 카네이션 바구니였다. 효심이나 애정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도 없이 그저 눈가림이나 하려는 내 마음과 꼭 닮아있. 그걸 들고 다니자니 꼭 내 속내를 다 들키는 것만 같아서 민망했다. 지하철에는 남아있는 좌석이 없어서 나는 그 바구니를 두 다리 사이에 내려놓은 채로 한참을 서서 갔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강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문 옆쪽으로 가서 기둥을 붙잡고 기댔다. 하지만 점점 똑바로 설 수가 없어졌다. 내 몸통은 자꾸 기둥과 벽 사이를 통과하여 맨 끝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엎어지려 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사과를 할 정신도 없어서 그냥 바닥에 앉아버렸다. 사람들의 시야에서 내가 사라지도록 좌석의 옆면에 숨다시피 기댔다. 곧 눈앞이 까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까만 세상 속에 "여기 앉아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많은 여자분의 목소리였다. 나는 꼭 자리에 앉고 싶어서 어르신께 진상을 부린 젊은이가 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역설적이게도 싸구려 카네이션을 든 채라니. 이 정도면 신이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파렴치한 역할을 내가 맡다는 것만 빼면, 재미있을 뻔했다.


  다음 역에 정차하면 바로 내릴 심산으로 버티고 있는데 누군가 내 팔뚝을 잡았다. 내가 계속 가만히 앉아 있으니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가와주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나의 몸짓이 혹 거칠게 느껴지지 않도록 느릿느릿 움직이는 사이, 작고 미지근한 손의 주름이 느껴졌다. 그 울퉁불퉁한 손에 닿는 나의 매끄러운 손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나는 간신히 "내려요"하 이야기한 뒤, 지하철이 정차하자마자 손발을 모두 활용하여 기어 나왔다.


  시야가 자꾸 흐려지니 선로에 떨어질까 봐 무서웠다. 일단 최대한 멀리 가려고 했지만 금방 벽에 부딪혔다. 하필 계단 면이라 길이 좁은 구간이었다.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가는 정말 선로에 떨어져 죽 것 같아서 나는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이고 정신을 다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오히려 호흡까지도 점점 불안정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결국 119에 전화를 걸었다. 설마 돈을 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을 하는 사이에 역무원 분께서 오시더니 119가 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주셨다.


  들 것에 실서 구급차에 태워지는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지하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 폐에 이상이 생긴 걸까. 낮밤을 바꾸어 지낸 지가 좀 되어서 비타민 D가 부족해진 걸까. 아르바이트 중 화장실 청소를 할 때 쓰는 독한 약품들이 몸에 누적된 걸까. 그렇다고 해도 그건 앞으로 개선할 수가 없을 문제들이었다. 한편 공복시간이 길어진 중에 생리 때문에 일시적으로 철분 부족이 발생했으리라는 건, 그럴듯하면서도 가장 긍정적 추측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다.


  정확한 원인은 병원에서도 알아내지 못했지만 수액을 놓아주는  맞으 좀 누워있다 보니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병원비가 얼마나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은 한 푼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비겁하게도 병원비 얘기는 쏙 빼놓고, 어쩌다가 잠깐 어지러워져서 구급차에 실려왔다고만 했다. 그리고 누워있는 나를 대신하여 엄마가 자발적으로 수납을 해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병원비를 내러 가신 엄마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의사 선생님께서 오셨다. 집에 가도 좋을지 보자고 하셨다. 펜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여보라고 하더니 아마 아직 어지럽기는 할 거랬다. 그러는 동안 나는 '겨우 이 정도 얘기를 한번 해주신다고 돈을 더 받는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 말대로 어지럼증이 조금 남아있기는 했지만, 엄마와 함께 본가로 돌아가는 동안에는 다행히도 더 이상의 민망한 상황이 발생하 않았다.






  병원에 가기 전에 그렇게 정신이 없는 채로 길바닥을 기어 다녔는데도 카네이션 바구니는 아주 멀쩡했다. 사람들이 매나의 짐을 꼼꼼하게 챙겨준 모양이었다. 성의라곤 하나도 담기지 않은 오천 원짜리 카네이션 바구니가 받기에는 황송한 대접이었다. 어쩌면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 지나치게 따뜻한 곳 걸지도 르겠다고 생각했다.


  카네이션을 본 부모님께서는 예상대로 별 반응이 없으셨다. 영 예쁘지도 않은 걸 사 왔으니 솔직하게는 뭐라 할 말이 없어 난감하셨 수도 있겠다. 러나 아버지가 나에게 미리 말도 하지 않고는 그걸 할머니에게 가져다주시리라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어쩐지 허탈해졌다. 그 돈으로 편의점에서 따뜻한 꿀물이나 하나 사 먹고 올 걸 그랬 싶었다. 그러면 119에 실려가는 일은 예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나는 치졸하게도, 부모님께서 선물에 크게 감흥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시라는 데 내심 안도하였. 그 후로 나 다시 예전처럼 집안의 모든 생일과 기념일들을 날짜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편안하게 흘려보다. 가격이 얼마든지 실용적이고 적절한 선물이었다면 부모님의 반응도 달랐을 수 있으리라는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계속 편안하고 싶어서.






  병원에서 나를 데려온 이후로 엄마는 나의 생활환경에 대해 의심을 갖게 되신 모양이었다. 집에서도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방음부스를 설치해 줄 테니 아르바이트그만두고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건강 문제로 겁을 먹은 상태였던 나는 조금 혹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간다면 나는 다시 부모님의 가치관을 의식하게 될 거였다. 미래에 뭔가 안정적인 수익을 만들어낼 것이 확실하게 보장된 일만 찾아서 거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매일 같이 할 게 뻔했다. 그러면서는 죄책감 때문에 정작 내 작업에도 제대로 몰입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내 한 몸을 간신히 건사할 만큼의 돈 벌면서 하고 싶은 작업들이나 실컷 하며 살고 싶었다. 이게 딱히 직업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고, 그냥 쭉 이렇게 살고 싶은 거였다. 나조차도 납득하기 어려운 삶의 방식이었다. 이런 건 부모님이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납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 병원비라는 변수가 발생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해결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이제는 그런 주장을 펼칠 자격조차 잃은 걸지도 몰랐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방음부스에서 지내던 중에, 그런 내 고민은 정말 어이없게 끝이 났다. 일하고 있던 곳에서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이다. 일정 시간 이상 근무하아르바이트생에게는 주휴수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단속을 시작했던 시기였다. 그러자 기업들은 주휴수당을 지급하는 대신, 기준 시간 이하로 일하도록 근무시간을 나누어 여러 명을 고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만 일한다면 나 생활비를 벌 수가 없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아도 상황은 다 마찬가지였다. 야간에 일했을 때 법대로 1.5배의 시급을 주는 곳은 대기업 프랜차이즈 매장의 직영점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들은 모두 주휴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장시간 일하는 자리를 없애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퇴근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면 취업을 하지 않은 의미가 없어질 거였다. 나는 돈을 버는 데는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 덜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낮에 9시간 일을 하는 대신에 시급이 1.5배인 야간에 6시간 단순 노동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던 거다.


   달 벌어 그 달 사는 구조였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다면 나는 당장 월세부터 낼 수 없. 직전에 병원비 낼 수 없었던 일 또한 겹쳐서, 이렇게 최소로 돈을 벌고 최소로 소비는 삶은 영원할 수없으리라는 걸 나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집을 나오려면 증금이라도 만들어 나와야 할 거였다.






  그렇게 집을 나온 지 약 2년 만에 나는 다시 부모님 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출에 실패한 철없는 비행청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집으로 돌아오면서 내 방에 백만 원도 넘는 방음부스설치되었다. 이건 마치 집을 나가는 것으로 떼를 써서 비싼 무언가를 얻어낸 모양새가 아닌가. 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는 더 열심히 작업을 했다. 러면 또 생산적이지 못한 작업에 시간을 잔뜩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본가로 돌아간다면 집중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바와는 달리, 웹툰을 연재하고 디지털 싱글을 내는 은 그래도 계속할 수 있었다. 방음부스에서 살았던 동안 시스템을 만들어 두고 작업 패턴 습관화해 뒀던 게 정말 다행이었다. 본가에서 지내면서는 당장 수익으로 연결되지 않는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할 엄두까지는 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부모님이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 거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얼른 보증금이 될 정도의 돈을 서 다시 제대로 독립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땅한 일을 찾고 있던 중에, 친구가 구인공고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작가님들의 강연에 음악을 더하는 형태로 북콘서트를 하는 회사에서 뮤지션을 구한다는 공고였다. 처음 접하는 형태의 공연이었지만 이야기와 음악을 연계하여  나의 장점을 인정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작업했던 웹툰과 음악들을 포트폴리오로 보냈다. 그리고 면접을 볼 때는 예상대로, 이야기와 음악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이해도가 높을 거라고 기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렇게 싱어송라이터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취업 후에 공연했던 첫번째 무대. 약간의 건반 연주와 더불어 코러스를 넣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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