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츠 Daltz Apr 04. 2023

나는 집이 아닌, 방음부스에서 살았다.

야간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동안 나 수학을 팔아서 음악을 샀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화성학, 재즈피아노, 통기타, 보컬 등의 레슨 받 것이다. 물론 슨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만들어내는 음악이 당장에 엄청나게 발전할리는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다양한 레슨을 받는 중에 가장 꽂히는 하나를 찾아서 진득하게 배워본다면, 젠가 그것만은 하게 되겠지 싶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 분야를 정할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맞는 분야를 아직 찾지 못한 거라고 생각하며 온갖 레슨을 전전했다. 일종의 전공 같은 분야를 찾아내보려는 노력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나는 참 열심히도 헛다리를 짚고 있었다. 나는 연주자나 보컬로서 기술을 갈고닦는 것보다 프로듀서나 기획자로서 전체를 아우르는 작업을 좋아또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작곡 수업을 체계적으로 듣는 게 가장 나았을 거다. 곡을 만들어냈다면 이후에 연주는 전문 연주자 분들께 의뢰해도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사회성이 심하게 부족한 인간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하나의 곡을 만들 때도, 심지어는 하나의 공연을 만들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모든 걸 다 해내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영부영 대학을 졸업한 후까지도 나는 내가 원하는 구체적인 직업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학생'이라는 신분 뒤에 숨을 수 었다. 이제는 정말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와 버린 거다. 사실 나는 이 순간이 찾아올 것을 내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극단적으로는, 졸업할 때까지만 그냥저냥 버티고선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종종 했다. 그러다 때로는 충동적으로 한강 다리나 건물 옥상 같은 곳에 올라가 보기도 했지만 역 죽는 건 무서웠으므로 얌전히 다시 내려. 신체적인 고통을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천륜을 거스른다는 감각나를 압도하곤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비하는 나이까지는 잘 살아놓고선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고 죽다니. 이래서야 종교가 없더라도 지옥에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빚을 갚는 마음으로, 뭐라도 노동은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졸업 후에는 바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대학 졸업장이 전혀 필요 없는, 최저임금을 받는 단순 노동 아르바이트였다.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서 굳이 안온한 대학생활까지 누렸던 것에 대해서 나는 일종의 '먹튀'를 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소비자의 입장을 끝내고 생산 인구에 속하게 된 이상, 앞으로 나는 부모님께서 바라셨던 삶 흉내조차도 낼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도 돈을 내고 수업을 소비한다는 면에서는 소비자였. 그리고 돈을 쓰는 입장에서라면 적당히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울 리가 없는 법이다. 러나 돈을 버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  얄팍한 거짓말로는 절대로 통과할 수가 없을 세계였다.






   사실을 깨달은 나는 제라도 더는 부채감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은 집에서 나오기로 했다. 그 와중에도 음악과 이야기를 만들어내작업을 계속할 것 가장 먼저 생각했다. 런 시기일수록, 그런 작업들로 현실 도피를 하지 못한다면 당장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 하지만 연습실이나 작업실을 별도로 구할 돈까지는 없으니 아예 방음이 되어있는 공간에서 살기로 했다. 보증금도 없는 데다가 그런 특수한 조건까지 만족하는 곳을 찾다 보면, 지하에 위치해서 창문도 없는 공용연습실의 방음부스 중 한 칸 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다. 일층으로 올라가야 이용할 수 있는 공용화장실은 변기에 앉으면 무릎이 문에 닿을 정도로 비좁았다. 그나마 당시의 물가로 월세를 사십오만 원씩이나 들여야 했으니 상당히 비쌌다.


  물론 부스가 아닌 일반적인 로 구성된 연습실들도 있기는 했다. 그런 곳들은 생활공간을 겸하도록 샤워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화장실도 외부인들은 못 들어오는 지하층에 따로 있어서 연습실 사람들끼리만 같이 쓰는 거였다. 결정적으로 월세도 십오만 원쯤이 더 저렴했다. 그러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런 곳 중 하나를 택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활형 연습실들은 하나 같이 얇은 벽과 문 위에 흡음재를 더하는 정도로만 방음시공을 해두어서 방음이 거의 되질 않았다. 열 개도 넘는 방이 다닥다닥 배치되어 시끄러운 가운데, 연습은 어떻게 해본다 해도 녹음까지는 절대로 불가능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는 볼륨이 높은 소리에는 꽤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었다. 음악도 작게 들었고 큰 목소리에 거부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하루종일 소음의 한가운데 있자니 쉬는 시간에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아서 늘 피로했다. 또 방음이 제대로 되질 않다 보니,  내가 목소리를 내면 여자가 지내는 방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는 점도 좀 무섭게 느껴졌다. 옆방이고 앞방이고 전부 남자들 뿐인 환경이었다. 그래도 수많은 연습실을 직접 가보고는 생활시설이 가장 편리한 곳을 택했던 거라 이사 망설여졌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시에 나는 벽 6시까지 출근해야 하는 아르바이트를 서 일찍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날도 초저녁부터 자려고 누워있었는데 옆방로부터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친한 세입자들끼리 술판벌인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여기 옆방에는 여자애 살잖아"라는 이야기가 들려 가물가물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리고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게. 내가 아는 사람이면 여기서 지내지 말라고 할 것 같아. 저러다 강간당할 것 같아." 그다음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 딱히 악의가 담긴 뉘앙스 아니었건만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꽤 두꺼운 접이식 3단 매트 쫙 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나는 문을 잠그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러 그 매트를 방 안에 꽉 끼이게 하여 바깥쪽에선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해두고 잠을 다. 아침마다 매트를 접으려면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러니 밖에서는 누군가 문을 열려해도 열릴 리가 없었. 딱히 복도에서 인기척 느껴지도 않았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불안해할 이유 전혀 없 거였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밖에서 문고리를 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밤 내내 자다 깨다 하며 문에 닿아있발에 힘을 주어 문을 밀.


  다음 날 나절 정도를 고민하다가 나는 연습실 주인 분께 문자를 보냈다. 이번 달까지만 지내고 이사를 가겠다고. 방을 비우기 2주 전까지 고지를 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마침 다음 월세 날짜까지 2주 정도남아있다. 월세를 손해 보며 나가지 않으려면 결정을 빠르게 내려야 했다. 그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머릿속에는 계속 이사에 대한 고민들이 맴돌았다. 생활을 위한 시설이 그렇게 잘 갖춰져 있고 월세도 저렴한 연습실은 또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살걸 그랬나도 싶었다. 하지만 바로 얘기하길 정말 잘했다는 건 불과 몇 시간 뒤에 깨닫게 되었다. 막상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서 다시 연습실로 돌아가 방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제 낮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던 곳인데 사람 마음이 참 간사했다.


  결국 나는 연습실을 나와 동대문의 쇼핑타운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곧 너무 졸려져서는 건물 안에서 제일 깨끗한 화장실을  들어갔다. 변기 뚜껑을 덮어놓고 그 위에 앉아서 졸았다. 아주 가끔씩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그 너머로 부지런히 새벽 시장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자꾸 잠이 깼지만 이상하게도 그럴 때마다 귀찮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쩐지 아주 안전한 세상과 연결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공간은 무조건 방음을 최우선으로,  른 세입자들에게 나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 곳으로 구했다. 방음부스 여럿이 나란히 배치된 구조의 공용 연습실어서 다른 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을 하거나 레슨을 하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생활공간도 아닌 장소였 나는 거기서 살기로 했다. 숙식을 금지하는 연습실 있었기 때문에 주인분께는 미리 양해도 구해두었다. 밤샘 작업을 꽤 자주 하는데 그럴 때마다는 여기에서 자도 괜찮겠느냐고. 약간의 거짓말을 섞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이상 보일까 봐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그렇게 양해를 구했을 때 조금이라도 거부감을 보이신다면 양심껏 다른 곳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다행히 얼마든지 괜찮다고 말씀을 해주시길래 나도 흔쾌히 계약을 했다.


  두꺼운 문이 이중으로 치되어 있는 부스는 방음이 너무나도 잘 되는 나머지, 소리는 물론이고 공기마저 잘 통하지 않았다. 나는 집중을 시작하면 보통 서너 시간씩은 시간을 모르고 앉아있었는데, 집중력이 흐려지기 전에 먼저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방을 나서야 했다. 그럴 때마다는 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했지만 딱히 큰 효과 없었다. 애초에 지하로 내려오는 좁은 출입문으로부터 바깥공기가 많이 들어오질 않았다.


    때만이라도 숨이 답답해서 중간에 깨지는 않으려고, 나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열심히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여윳돈이 별로 없는 와중에도 만원 남짓 돈을 들여 '산소발생기'라는 걸 .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납작한 원통형 물건이었다. 뚜껑을 열면 산소가 발생되고 그게 며칠쯤은 지속된다는 걸 실험을 통해 증명한 영상이 상품 설명 페이지에 올려져 있었다. 택배는 금방 도착했다. 나는 기 직전에 '산소발생기' 뚜껑의 포장을 조심스럽게 뜯어내얼굴 바로 옆에 잘 두었다.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숨이 해져서  서너 시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 하긴 생각해 보면 전원이 연결되는 기계도 아닌데 이렇게 작은 통 하나가 며칠씩이나 숨쉬기 편할 만큼의 산소를 만들어줄 리가 없다.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 게 렇게 쉽구나 싶어 허탈해졌다. 당장은 더 이상 돈을 쓸 수도 없어서 다음 월급날까지 기다렸다가 그때는 산소를 많이 만들어내는 편이라는 식물을 들였다. 푸른 잎을 보니 기분이라도 상쾌해졌다. 그래도 호흡 문제가 해결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차피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괜찮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사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신에 앞으로는 잠을 잘 때마다 두꺼운 이중문 중에서 안쪽 문 열어두기로 했다. 바깥문만 잠그고는 최대한 문틈 쪽으로 코를 박고 자는 거였다. 그러다 코가 시려 잠에서 깨어나 보면, 나는 어느새 바깥쪽 문  열어둔 채로 그 틈을 향해서 코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숨을 쉬기답답해서는 잠결에 여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내 방은 구석 쪽에 위치하여 바깥쪽에서는 내 코가 보이지 않을 구조였다. 또 쉬는 시간이면 다들 환기를 위해 문을 조금씩 열어두 했으므내 방 문이 조금 열려있는 것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바깥의 사람들이 그 안에 있는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 것 물론이고, 그 안에서 아예 쭉 살고 있다는 건 정말 상상 하지 다. 예전에 방음이 잘 되지 않았던 연습실에서의 생활에 비하자면, 비로소 보장된 익명성은 무척이나 포근했다.






  연습실에 샤워 시설은 없었지만 작은 세면대가 하나 있었으므로 나는 세수를 하고 앞머리만 감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은 대중목욕탕엘 갔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사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도록, 월요일과 목요일마다 출근하기 직전에 씻었다. 머리를 감은 지 3일 차가 되어가는 수요일마다는 늘 아슬아슬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규정상 머리망을 착용하게 되어있는 곳이라 티가 덜 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3층짜리 24시간 커피전문점을 한 층씩 비워가며 차례로 청소하는 일어서 사람과 마주칠 일도 많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근무시간은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의 직영점이라 시급이 낮 시간에 일하는 것의 1.5배였고 대부분의 시간에 혼자서 일을 하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들어서 지원한 자리였다. 연습실로부터 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차비도 들지 않았다. 처음 면접을 보러 갔을 때 매니저님께선 "이거 생각보다 꽤 힘들어서 남자분들도 보통 두 달 안에 그만둬요"라고 하셨다. 나는 얼른 넓은 어깨가 강조되도록 몸을 쫙 펴고 앉아서, 여자이지만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만큼 체력 역시 좋다고 어필했다. 간절함이 보였던 건지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덕분에 나는 근처 연습실에서 살았던 일 년 하고도 두 달 동안을 그곳에서 할 수 있었다.


  일이 힘들다는 이야기가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야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선  달 만에 몸무게가 7,8kg이 빠졌다. 청소를 하는 것보다도 의자를 모두 테이블 위에 올렸다 내리는 게 힘들어서 처음에는 근육통도 생겼다. 그래도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 보니 곧 필요한 근육들이 발달하 괜찮아졌다. 이후 두 달쯤에 걸쳐서 몸무게도 복구가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로 끼니를 대충 때우고는 바로 잤던 탓도 있겠다. 유통기한이 지난 머핀이나 식이 가끔 나에게 돌아왔다. 또 복지의 의미로 한 달에 하나씩 포장해 올 수 있는 허니브레드 다른 직원 분들이 본인 것까지 내 앞으로 챙겨주시기도 했다. 공짜여서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한 끼였다.


  8,90만 원의 월급 중에서 월세와 목욕비로 나가는 게 50만 원, 휴대폰 요금과 가끔 타는 대중교통비로 나가는 게 10만 원 정도였다. 그 와중에 나는 조금씩이라도 저축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성격이라 매달 몇만 원씩이라도 남기려 했다. 아끼기에 가장 만만한 건 식비였고 나는 보통 한솥도시락에서 천칠백 원에 파는 '새댁도시락'이나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곤 했다. 가끔 기분을 낼 때면 삼천 원 초반대의 '혜자도시락'을 먹었다. 사실 나는 밥보다 디저트를 더 좋아하는데, 그나마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밥을 고르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일하는 곳에서 가끔씩 받아오는 디저트 메뉴들 어찌나 달콤했던지.


  야간 아르바이트마친 상태에서 배까지 불러지면 졸음이 몰려왔다. 세상이 밝아올 시간에 잠을 자기 시작하니 창문이 없는 지하라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오히려 장점이 되었다. 숨이 답답한 느낌에도 적응이 되었는지 나는 금방 잠을 꽤 잘 자게 되었다.






  그렇게 일을 하는 시간과 잠을 자는 시간 외의 모든 깨어있는 시간에, 나는 대부분 음악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다른 '활'이란 것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업실에서 지내 자연히 더 그래졌다. 이 돈이면 생활을 하기에는 훨씬 더 편한 고시원에도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작업 때문에 굳이 주거시설이 아닌 곳에서 지내고 있는 거였다. 그러니까 최대한 작업을 많이 해야 일종의 '가성비'가 좋아지겠다는 이상한 계산 적용다. 주머니를 따라 가난해진 마음은 그렇게 별의별 곳에서 다 '가성비'를 찾으려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미숙한 창작활동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수익으로 연결 여지를 들어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할 수 있는 금액이 아주 적거나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더라도, 뭐라도 해보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다음 편에 계속.)



내가 살았던 방음부스. 산소를 방출해줄 것을 기대하며 식물을 구입했던 것이 당시에 누렸던 최대의 사치였다.


작가의 이전글 누군가의 꿈을 비웃지 말아 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