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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Mar 31. 2023

누군가의 꿈을 비웃지 말아 주세요.

부모님과 선생님은 참 어려운 역할이겠지만

  직업명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없는 꿈을 그리더라도 아직은 괜찮을 것 같았던 청소년 시절. 막연 음악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해본 적이 다. 나는 등학교 고학년 때부터도 혼자서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걸 좋아했으니, 대학에 가기 전에 더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를 배우면서 음악 쪽의 직업을 탐색해보고 싶진 거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네 나이 때는 원래 다 스타가 되고 싶은 거야."라가볍게 웃어넘기셨다. 정말로 스타가 되고 싶어 했던 사람이라도 그런 말에는 상처를 받수 있겠는데, 심지어 그렇지도 않았 나는 중으로 충격을 받았. 어른이 청소년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건 그래도 흔히 일어날 법한 일이. 지만 가족이 내 성격을 전혀 모른다는  흔치 않게 서운질 법한 일이었다.


  나는 학교생활에 다소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내성적이었고, 런 문제들은 선생님을 통해 부모님에게까지 전해진 적 꽤 있었다. 들에게 지속적으로 노출되서워하는 편이었으며, 기성 시스템 속에 들어가 대중적으로 유명해지는 삶을 그다지 멋있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고등학생 즈음엔 '중2병'에 '홍대병'까지 더해져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드림콘서트' MR 축제 아니냐며 폄하하는 가운데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을 꼬박꼬박 즐기러 니까.


  스스로도  음침한 것이 아닌가 가끔 고민 했던 그런 성격이 형성되는 데는 가족들도 분명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니까 그걸 몰라준다는 지점에서 나는 서운함을 넘어  나버렸다. 청소년기 특유의 감수성과 반항심이 더해져서였을까. 이야기를 더 이어가니 눈물이 쏟아려고 했다. 큰맘 먹고 꺼내보려던 이야기는 그렇게  마디 제대로 주고받지 못한 채로 쏙 들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했던 대화가 오간 로 부모님께서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해주셨다. 가지망친구와 함께 오디션 비디오를 제작해 보도록 친척으로부터 비디오카메라를 빌려다 주신 거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단발적인 이벤트를 벌이고 싶은 게 아니라 근차근 언가를 배우며  장르와 직업을 탐색해보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학생이면서 공부가 아닌 분야에 그렇게 비용과 시간을 들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아무런 배움 없이도 당장 직업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아니라면 음악 쪽의 일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하긴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당장 나부터도 음악과 관련된 먹고살만한 직업을 떠올려보자면 문턱이 끝도 없이 높아 보이는 가수나 작곡가, 그리고 선생님 정도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즘만큼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도 아니었으니 어른들이라고 해서 딱히 정보량이 더 많을 수도 없거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내 모습이 비디오에 찍히는 순간은 어색하고 창피할 뿐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나니 정말로 철없는 스타지망생이 된 기분이 들어 서글퍼졌다.






  부모님과의 짧았던 대화는 그렇게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이 는 것 같았다. 지만 이후 어머니께서는 고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 중 한 분과 그 일에 대하여 모종의 대화를 나누셨던 모양이다. 어느 날엔가는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조사하는 용지를 나눠주었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나를 흘끗 쳐다보시더니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하는 양 웃으 말씀을 하셨다. "이거 평생  기록이까 '가수'같은 거 쓰지 마라".


  순간 얼굴로 열이 확 몰렸다. 수치스러웠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털어놓았던 내 꿈을 고민거리 삼아 선생님께 전달한 어머니. 그리고 그것을 한없이 가볍게 지적해 버린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한창 염세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청소년이 인간에 대한 환멸을 폭발시키기엔 충분한 환경이었다. 나는 그날 장래희망란에 사람을 직접적으로 상대하지 않는 온라인 유통업을 하고 싶다고 써냈다. 


  리고 로부터 12년 뒤, 음악으로 돈을 벌지 못하는 동안 제로 온라인 유통업을  생활비를 벌었다. 평균 4시간 이하로 일하며 중소기업 연봉만큼의 수익을 내는 사업을 3년쯤 지속했으니 꽤 잘 풀린 거였다. 그렇게 생계유지를 위해 일하는 시간을 최소화해 두고, 나는 음악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활동으로 먹고살게 되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언급하셨던 '가수'의 역할로 무대에 서기도 하면서 말이다. 당시의 나는 물론 어리고 미숙했지만, 적어도 스스로에 대서만큼은 주변의 어른들보다   알고 있었 게 아닐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어머니께서는 그 선생님께 과일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셨고 했다. '가수'같은 직업에 눈을 돌리지 않고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올바르게' 지도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는 참 씁쓸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학기 중이 아니라 굳이 졸업 후까지 기다렸다가 선물을 보내는 어머니모습 참 반듯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나 역시 다소 강박적일 정도로 반듯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나는 나의 그런 부분을 꽤 좋아한다. 그러나 그 반듯한 환경은 자라는 내내 나를 숨막히게 만들기도 했다. 그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희대의 악역이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버지께서는 평생을 성실하게 한 직장에서 근무하셨다. 어머니께서는 교사로 일하시다가 아이를 키우면서부터는 전업주부가 되셨다. 어렸을 때부터 모범생으로 자라나 평생을 학교 안에서 지내신 선생님 역시 그와 결이 비슷한 분이셨을 것이다. 그러니까 타입의 아이가 태어났다면 꽤 안정적으로 자랄 수있었을 법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하필 상성이 너무나도 나쁜 내가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게 된 거다. 부모님께서도 참 운이 없으셨지 싶다. 나는 조직생활을 유난히 답답해.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지내는 건 정말 안 맞을 성향이었다. 무언가를 창작하며 사는 삶 꿈으로 남겨둔다 해도, 적어도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되어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내 성향을 이야기해 보면 부모님께서는 "자꾸 못한다고 생각하니까 더 못하겠는 거야." 같은 말들을 하셨다. 왜 굳이 호하지 않는 삶하여 역꾸역 살아내  것일까. 나는 의문스러운 동시에 그런 의문을 갖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다. 부모님께서 그런 삶을 선택해 주신 덕분에 나는 경제적으로 큰 부족함 없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었. 내가 그대로 살지 않겠다는 것은 권리만 누려놓고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아닐까. 러니까 나에게 권장되는 것은 안정적인 평생직장에 소속되어 돈 벌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아 사회와 가정에 기여하는 삶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아주 조용하게, 혼자서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런 주장을 입밖에 내는 것은 너무도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일로 느껴졌다.


  게다가 모님으로부터 물려받 나의 유전자 역시 내게 전형적인 모범생 삶을 권장고 있. 가 꿈꾸었던, 음악과 이야기를 창작해 내는 쪽으로 라면 나 그렇게까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아지 싶었. 면에 공부를 하는 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성적을 받도 나는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내가 바라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괴리감 더 컸다. 그럭저럭 공부를 하는 아이로 살아가고 있자면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거짓말 하고 있것 같았다. 하긴 나는 스스로의 욕망을 속이고 있는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그것도 일종의 거짓말이 맞았다. 그리하여 연세대학교에 입학을 했을 때는 이젠 드디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거짓말을 해버렸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무섭고, 불안했고, 또 외로다.






  다행히 나이가 들어가는 동안 나는 나와 비슷한 성향의 친구 류를 지속할 수 있었. 또 내 성향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는 사람과의 안정적인 애착 관계도 경험해 보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봐주고 그에 맞는 삶을 찾아가도록 응원해 주는 관계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 거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더라면, 나는 굳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음악과 이야기를 창작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려  않았을 거다. 내 성향도 맞으면서 적당히 안정적이기도 한 전문직 프리랜서나 자영업자 정도의 직업 적당히 만족했겠지 싶다. 필요에 따라서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는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가정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창작 활동들은 그냥 취미로 두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아예 창작자도 아닌, 그저 가끔씩 어딘가에 깊이 몰두하는 감상자에 그쳤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큰 문제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예전의 나는 결국 마음을 기댈 곳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음악과 이야기를  나만의 세계를 창작해 내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또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지내면서는 점점 비현실적인 사람이 되 현실의 주변인들과는 애착형성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이렇게 한 걸음 떨어져 볼 수 있게 되고 나그게 얼마나 불건강한 흐름이었는지를 알겠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들을 단순히 '악순환'이라고 표현해 버리기엔, 나는 그 안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세계를 만났다. 그리하여 지금은 마침내 행복한 채로,  속에서 살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유난히 꿈처럼 아름답게 느껴지는, 가을 밤의 야외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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