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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Apr 30. 2023

출발, 인디밴드! 멤버를 찾아서 (1)

그렇게 나는 중용의 미덕을 깨닫고.

  밴드 멤버를 모아보기로 결심했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내세울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음악적으로 출중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고 그럴듯한 이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고민을 하던 중에, 예전에 우연 스쳤던 퍼커션 연주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웹툰과 음악을 연계하여 혼자 작업을 이어가던 시절, '우리 앞집엔 아티스트가 산다'라는 작은 행사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행사를 주최한 단체의 일원이었다. 무대에 서지는 않았으므로, 퍼커션을 연주한다는 건 뒤풀이 때 카혼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  되었다. 바로 전공자가 아 걸 알 수 있을 만큼 프로페셔널하지 못했. 하지만 그런 부분을 나름의 언더그라운드 감성으로 살려낸다는 점과 다소 비현실적인 류의 열정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나는 그 친구의 연주에 크게 공감 했었다.


  건반이나 기타를 조금씩 다룰 수 있는 싱어송라이터인 나는, 마침 퍼커션 연주자를 가장 먼저 구하참이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연락 보았그 친구는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다고 했다. 게다가 미필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나는 미필이라는 점을 큰 문제로 인식하지 못했다. 구인을 해본 적도 없었고 가까운 사람이 군대에 간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음악적인 단계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거의 이십 대 초반이려나 보다, 누군가와 함께하더라도 세대 차이는 감수해야겠구나, 라는 생각만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이미 연주가 마음에 들었던 이상 더는 고민을 할 것도 없었다. 일단은 홍대 앞 클럽에서 진행할 몇몇 공연을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서로 괜찮다면 추후 곡 작업들과 녹음까지도 같이 하며 활동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 친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공감하였던 '비현실적인 류의 열정'은 나의 그것과 공명하여, 바보 같으면서도 꽤 재미있는 시너지를 냈다. 둘 다 자차가 없어서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나는 집에 있는 컴퓨터와 장비 일체를 모조리 연습실에 싸들고  적이 있다. 연습 삼아 녹음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다이소에서 파는 커다란 타포린백에 에어캡으로 감싼 본체와 모니터를 넣고 그 위에는 오디오카드와 키보드, 마우스까지 잘 얹은 다음 지퍼를 잠갔다. 그걸 들고선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또다시 마을버스를 타고선 한 시간 반 거리의 연습실까지 이동 .


  그 친구는 겨우 세 곡을 선보일 수 있는 아주 작은 클럽 공연을 위해 지하철로 이동하 나의 88건반 키보드를 날라다 준 적이 있었다. '악기는 각자 지참'이라고 해서 그런 걸 들고 오는 뮤지션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 둘 다 그날 공연을 하면서야 깨달았다. 건반 연주를 그리 잘 하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더 민망. 다음부터 건반이 없는 공간에서는 그냥 기타로 연주하는 곡만 준비하자는 당연한 이야기를 그 날 공연을 마치고서 나누었다.


  그 친구는 어려서 그랬다 쳐도, 나는 곧 서른이 되는 나이였는데 현실감각이 없어도 정말 너무 없었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있으니 무모한 도전들도 할 수 있었지 싶다. 연습을 할 때면 한 곡만으로도 두세 시간쯤은 쉬지 않고 집중하 반복을 하곤 했다. 보통 밴드들이 매일 같이 그런 식으로 연습을 하 않을 텐, 리는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각자의 실력이 발전하는 속도도 제법 빨랐고, 짧은 기간 안에 자작곡들 꽤 많이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자작곡을 늘려가며 몇 차례의 공연을 마쳤을 무렵, 그 친구가 멤버를 한 명 더 뽑자고 했다. 음을 내주는 악기라곤 내가 연주하는 건반이나 기타가 전부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실력이 그리 출중하지도 못했으므로 사운드가 비낌이 컸다. 건반과 베이스 중 어떤 파트를 더할지 고민하다가, 베이시스트를 뽑자고 결론을 냈다. 건반은 그래도 내가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으니 연습을 좀 더 해보기로 한 거다.


  슬슬 밴드의 색깔이 잡혀가는 시점이었고 자작곡을 공연하는 영상도 여럿 찍어두었으므로, 제는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구인공고 올릴 수 있었다. 뮤지션들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인터넷 사이트에 공고를 올렸다. 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처음으로 연습실에 찾아오신 분은 어딘가 수상쩍은 인상이셨다. 어찌 보면 꼭 인디밴드의 베이시스트다운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다. 하지만 우리 곡을 공고 내용에 려두었는데도 연습을 전혀 해오시지 않았고, "연락 온 사람이 더 있어요?"하며 신기해하시기도 했다. 진지하게 밴드에 임하고 있던 나와 퍼커션 멤버는 다소 상처를 받았다. 지금보다 훨씬 부정적인 성향이었던 나는, 현재 우리 단계에선 이렇게 진지하지 못한 연주자들밖에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비약하 우울해다. 밴드를 시작한 사람으로서 기세를 꺾고 싶지는 않았 때문에,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않았지만.


  다음으로 와주신 분은 약간 긴장을 하신 게 보였다. 전에 왔던 분과 대비가 되어 그런 태도만으로도 괜히 성실하게 느껴졌다. 우리 곡도 제대로 연습을 해오다. 게다가 본인이 자신 있는 연주도 따로 보여주셨다. 그렇지만 쭉 함께할만한가를 생각해 보면, 사실 크게 와닿는 부분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해서 결정을 내리게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퍼커션 멤버가 갑자기, 그럼 앞으로 잘해보자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당황한 나는 "이렇게 바로? 나중에 연락드리는 게 아니고?" 상황을 무마해보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 같이 신발을 신고 연습실을 나서는 중이었다. 연습실 앞의 망원시장에서 이천 오백 원짜리 칼국수를 먹으며, 세 사람이 함께하는 밴드결성되었다.






  엉겁결에 뽑게 된 새로운 멤버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기존 멤버에게 그렇게 바로 혼자서 결정을 해버리면 어떡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사람을 뽑아본 게 처음이라 몰라서 그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화가 났지만 이미 번복할 수는 없게 된 상황이었다. 그냥 다 운명이려니 하고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멤버의 연주에서는 나와 기존 멤버보다 음악적인 경험이 훨씬 많다는 게 확연히 드러났으므로 어찌 보면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인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딱히 크게 와닿는 부분이 없는 사람을 밴드 구성원으로 받아들여도 될지가 나는 혼란스러웠다. 기존 멤버는 음악적으로 그다지 다듬어져있지 않았음에도 그 연주로부터 공감할 수 있는 포인트가 확실했고, 그 부분에서 나와 낼 수 있는 시너지도 컸다. 반면에 새로운 멤버는 오디션 준비를 잘 해와 주었는데도 그로부터 나는 어쩐지 불타는 열정이 아닌 미지근한 성실함을 느꼈다.


   미지근한 성실함을  유지해 줄 수 있는 구성원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그때는 전혀 몰랐 거. 지금의 나는 개성이 매력적인 연주자력이 어느 정도 괜찮으면서 실한 연주자가 있다면 대체로 후자를 선호한다. 그렇게 취향이 변화하게 된 첫 기가 바로,  시절 새로 만났던 베이시스트 멤버. 


  당시의 내 좁은 시야로  멤버와 하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 수도 있. 그런데 기존멤버가 멋대로 결정을 내는 바람에 가치관의 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 거다. 연이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나와는 다른 판단을 내려준 사람으로 인해 내 세계가 확장 거였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에서 다듬어져 갔다. 밴드를 시작한 뒤로 거의 10 흐른 지금은, 연주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향을 바라볼 때도 비슷한 맥락에서의 변화를 겪은 상태다. 예전에는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나와 장단점이 비슷한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나와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더 좋아다. 나의 장점 부각시킨 결과물을 보면 그 코드가 크게 대중적이진 못다. 그러니까 누군가와 시너지를 내서 그런 장점이 강화된다면 더욱 난해한 결과물이 나기도 했다. 소수의 마니아층은 좋아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많은 이들과 교감을 나누기는 어려웠다.


  하긴 많은 이들과 교감을 나누기를 선호한다는  도 예전의 나로서는 상도 할 수 없을 일이다. 새로운 베이시스트 멤버를 시작으로, 이후로 만난 멤버들, 그 밖에도 밴드 외부에서 작업을 함께하게 된 동료들을 통해 는 점점 둥글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내게 영향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고마움을 느다. 나이가 들면서 모난 면이 강해가는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점점 더 어려워하는 것을 보았고, 그게 남일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조금 덜 예술가다워졌기는 하지만,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차피 예술가다운 성정을 가져봤자 꼴불견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이제 훌륭한 예술가보다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고 싶다.





  

  밴드에서 새로운 멤버를 뽑은 후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에 어디선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안정적인 조직은 30%의 기획자와 70%의 수행자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다. 나는 100%가 기획자의 역할을 맡아 열정적으로 참여를 해주 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이론에 따르면 모두가 기획자인 조직은 오히려 안정적일 수가 없다고 했다. 보통 기획자 타입은 순환이 되고, 수행자 타입만 오랫동안 소속을 유지하기 때문이란다.


  새로 온 멤버 수행자 타입로 보였다. 나와 기존 멤버는 기획적인 성향이 컸다. 그러니까 우리 밴드는 그 비율이 반대로 된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도 사람이 단 셋뿐인 데다가 밴드라는 특수성이 있으니까 일반적인 조직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이론을 적용할 수는 없겠지 싶.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 30%의 법칙은  밴드 안에서도 이루어된다.


초기 멤버 셋이 함께했던 어느 공연 날의 모습.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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