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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츠 Daltz May 07. 2023

출발, 인디밴드! 멤버를 찾아서 (2)

저는 매력적인 목소리의 보컬입니다.

  처음 활동을 함께 시작했던 퍼커션 연주자는 밴드의 고정 멤버가 되기로 약속을 했던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을 이제 막 시작하는 시점이라 다양한 활동을 경험해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나도 머리로는 그걸 이해했다. 하지만 마음은 어쩐지 서운하고 불안했다. 그 친구가 당장에 다른 활동들을 활발하게 시도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생각하고 있는 바를 이야기한 것뿐이었는데도 그랬다.


  지금의 나라면 전혀 그러지 않았을 텐데. 꼭 뮤지션들 뿐만 아니라 프리랜서의 세계에서라면 프로젝트별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런 세계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말이 마치 회사 두세 개를 동시에 다녀보겠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미필이었던 그 친구가 상근으로 복무를 하게 된 후로 나의 불안은 더 커졌다. 처음에는 군대에 가더라도 가능한 시간에 같이 곡 작업을 하고 연습을 하는 식으로 활동을 이어간다면 괜찮겠다고 생각했었다. 어차피 내 실력도, 밴드의 음악도, 몇 년은 더 다듬어져야 할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막상 복무 시작 시간과 신분에 제약이 생기면서 밴드의 성장이 더뎌지는 게 크게 체감되었다. 특히 공연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시도하는 초기의 시간은 특히 농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때만 나오는 폭발적인 추진력이 있기 때문에 활용을 잘해야 하는 거다. 그런데 아직 그 추진력이 다하지도 않은 시기에 외부요인에 의해 정체가 시작되니 무척 속상했다. 그래도 음악적으로 꽤 잘 맞는 부분이 있었으므로 100%를 우리 밴드에 걸고 있는 멤버라면 나도 큰맘 먹고 시간을 투자해 보겠으나, 그런 확신도 없는 상태였다. 잘못했다간 약 2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치열하지 못하게 지내며 낭비 하겠구나 싶 심란해졌다.


  또 가끔씩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는 면에서 장점으로 느껴졌던 그 친구의 개성 강한 성격이 그즈음에는 다소 거칠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난히 걱정이 많았던 나는, 공연을 할 때 그 친구가 했던 멘트 중 몇몇은 우리가 유명했다면 분명 논란이 됐을 거라고 생각하 미리 고민했다. 반면에 그 친구도 가치관이 딱딱한 편인 나를 답답하게 느끼는 마음이 커진 것 같았다. 가끔 행사 무대에 섭외가 될 때면 나는 주최 측의 요구에 맞추어 밝은 곡 위주로 선곡을 했는데, 그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타협적이라고 싫어했다.


  밴드의 초창기 자작곡 중에선 어둡고 독특한 분위기의 곡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보통 나들이를 나온 가족과 연인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행사 무대엔 우리 밴드가 원하는 이미지대로 설 수는 없었다. 나는 주최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 싫다면 아예 출연을 거절야겠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일단 무대에 서서 담담하게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해나가다 보면 진심은 통할 거라고 말했다. 주최 측에게 맞추지도 않고 출연도 포기를 못하겠다는  대체 무슨 심보냐고, 그런 담담함은 우리 밴드의 이름을 보고 공연을 보러 와주는 사람들이 생겼을 때나 발휘할 수 있는 거라고, 비난하면서 나는 일종의 동족혐오를 느꼈다.


  나 역시도, 실은 현실감각이 전혀 없는 거면서 스스로는 꼿꼿하게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고 믿는 일이 많았다. 또 계속 렇게 살아가기 위해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한 결심을 결연하게 하곤 했다. 그러다가 나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의견을 마주하니 일종의 거울 치료가 되다. 래서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와중에도 혹시 내가 순수함을 잃 세속적인 때가 묻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과연 래도 되는 건지에 대해서는 란스러움을 느. 그러나 그조차도 나잇값을 못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현실적이 되려고 노력해 봤자 회사원들이 보기에는 철없는 이상주의자일 거였다. 계속하여 이상주의자로 살아가 싶다면 나금은 철이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퍼커션 멤버와는 감정의 골이 깊어져만 갔다. 어느 날엔가 또 비슷한 논쟁을 하다가는 이런 식으로 계속 함께할 수는 없겠다고, 그 친구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나도 바로 수긍을 하였다. 가장 처음으로 함께 공연을 했던 멤버는 그렇게 일 년 반 만에 밴드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이에 비해 사람을 대하는 데 미숙하다는 마침 나의 콤플렉스였다. 러니까 이번에도 또다시 사회생활 중 인간관계에 실패한 것이 아닌가 싶었. 이런 사회성으로 과연 누군가들과 함께해야만 하는 밴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스러다.


  가장 활기찬 성격이었던 전 멤버가 떠나고 나니 활동을 같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멤버를 대하는 것도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둘이 있다 보니 기존의 약속들 자연스럽게 그대로 지켜졌다. 우리는 그동안 해왔던 대로 주 2회씩의 연습을 지속하며 새로운 퍼커션 멤버를 구해보기로 했다. 일상적인 활동이 반복되는 덕분에 부정적인 잡념들이 끼어들 여지가 줄어들었다. 사람이 단 둘 뿐인 밴드에서 나는 그렇게 조직이 갖는 관성적인 힘을 느꼈다. 그리고 역시 으로도 사람들과 함께해야 성실함을 유지해나기가 쉽겠다고 생각했다.


  로운 퍼커션 멤버를 뽑는 구인공고이번에도 인터넷에 올렸. 가장 먼저 연락을 준 친구는 하필이면 밴드를 나간 이전 멤버와 나이가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군필자라고 했다. 나이가 어리면 아무래도 전 멤버처럼, 한 밴드에서 안정을 찾기보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전 멤버가 떠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나는 부정적인 터 했다.


  오디션을 보러 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음악 취향부터가 나와는 굉장히 달랐다. 대체로 신나는 걸 좋아하고 가사는 거의 듣지 않는 편이라니,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주관적인 감상에 빠지기보다는 냉정하게 객관적인 연주력부터 평가하는 타입이라는 점도 내겐 좀 낯설었다. 나는 꽤나 마음에 드는 감성이 담겼다고 생각하여 유튜브에 올렸던 예전의 어떤 라이브 영상에 대해서는, 솔직히 너무 못해서 굳이 그걸 공개한 게 놀라웠다는 평을 들려주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훗날 좀 친해진 후에 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처음 이야기를 나누면서는 우리 밴드와 색깔이 맞지 않는 연주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함께 합주를 해보았더니 밴드의 자작곡들이 한층 더 신나고 대중성 있게 들렸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의 연주가 더해져서 그렇게 는 모양이었다. 짧은 기간이라도 이렇게 새로운 연주자를 경험해본다면 나도 이제까지와는 다른 부분에서 발전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되었다. 또 운이 좋아서 쭉 같이 하게 된다면 우리 밴드의 음악이 조금 더 대중적으로 다듬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중에 연락을 주기로 하고선 이런저런 고민을 해보다가, 나는  문자로 연락하여 새로운 멤버와 함께할 다음 합주일을 잡다.






  그렇게 퍼커션 멤버와 만났던 것이 2015년, 베이스 멤버와 만났던 것은 2014년이다. 지금은 2023년이니 벌써 십 년 가까이 셋이서 밴드 활동을 해온 거다. 그리고 멤버들은 괜찮은 연주자 이상으로 내게 점점 더 좋은 동료가 되어주었다. 밴드는 이제 사업체가 되었다. 그러면서는 음악 외에도 각자가 맡아야 하는 다른 일들이 생겼는데, 그 업무 분담 자연스럽게 이루어다는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은 기획 및 운영을 내가 하는 대신 멤버들은 각각 음향과 운전을 맡아주고 있다. 매번 다른 장소에서 공연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는 우리에게 음향과 운전은 비중이 매우 큰 업무다.


  사실 초반에는 두 멤버 모두 무언가를 새롭게 제안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점에서 내가 쉽게 서운해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연주자를 구했던 거지 기획자를 구그들과 만나게 된 것 아니었으므로, 무슨 아이디어라도 좀 내보라는 요구를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건 노력 문제가 아니라 성향 문제다. 내가 강요한다고 해서 멤버들이 갑자기 열정적으로 방향성을 제시하는 으로 변할 리 없었. 


  잘 생각해보면 멤버들의 성격이 그렇게 무던했기 때문에, 몇 년씩이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큰 갈등 없이 드가 지속될 수 있.  멤버들은 예전부터 무언가 내가 결정을 내리고 나면 결국 실행 단계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 함께 해 해주었다. 지금 멤버들이 음향과 운전 등의 업무를 분담해준 것도 굳이 따로 정해서가 아니라 각자 해줄 수 있는 것들을 해주다 보니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미 분업이 잘 되어버려서도 그렇겠지만, 이제 나도 동료들에게 리한 기대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서운해할 일도 없어졌다. 멤버들도, 객원으로 함께하는 배우나 연주자들도, 각자 맡은 바를 잘하면서 쭉 함께해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다.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면서 게다가 꾸준한 사람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예술에 한 다리를 걸치고 있는 업계에서는 특히 더 그런 건지, 반대로 입만 살아있는 사람들도 나는 꽤 많이 보아왔다. 그런 사람을 식별해 낼 안목조차 없던 시절에 우연히 지금의 멤버들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생각한다.


새로운 멤버가 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했던 공연 모습이, 우연히 아주 짧게 방송에 스쳤다. 멤버들 사이에선 한동안 저 자막이 하나의 밈으로 쓰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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