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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솜사탕 Sep 23. 2023

조카가 태어났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산다는 것

 드디어 조카가 태어났다. 2.45 kg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10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언니가 거진 8개월 가까이 입덧을 한 탓인지, 아니면 태생이 마른 체질인 형부 덕인지 초음파 사진 속 아이는 늘 비쩍 말라 있어서 작게 나으면 엄마가 자연분만하기 쉽다며 의사 선생님이 위로해주곤 했더랬다. 혹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는 건 아닐까 모두 걱정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건강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탯줄 자르러 온 자기 아빠를 향해 쉬 분수를 쏘아 올린 모양이다. 그리고 언니가 한 마디 덧붙였다. 키도 클 만큼 커서 인큐베이터엔 다행히 들어가지 않았다고.

 진짜 “나왔구나.”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조카가 나왔다. 조카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언니를 생각해도 마음이 울컥한다. 10년 전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가족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2013년 1월. 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거기에 10년 안에 완전히 시력을 잃을 것을 선고받았다. 치료제는 눈물약뿐, 아무것도 없었다. 처방은 어느 의사나 하는 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그것뿐이었다. 처음 시력에 이변을 느끼고 병원을 5년 가까이 다녔지만 그 외에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세상도, 가족도, 나 자신도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는 것.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사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야생동물이라면 실명하는 순간 어쩌면 지금 이미 죽었을 터인데 인간이란 이유로 복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냥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는진 몰라도 그 생각은 아주 잠시 머릿속을 스쳤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식구가 자살하면 그것도 가족들한텐 트라우마로 남을 테니까.

 “저는 시각장애인 되고 8년 만에 집 밖에 나왔어요. 선생님은 나오시는 데 얼마나 걸렸어요?”

 학생이 어느 날 조용히 물어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음... 전 집에 있었던 적이 없어요. 저시력일 때도 돌아다녔고 거의 안 보일 즈음 바로 기초재활 받으러 갔으니까요.”

 “진짜요? 선생님 긍정적이시네요.”

 “긍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뿐이에요. 제가 집에 처박혀 있으면 저는 세월을 까먹고, 돈 벌 기회도 잃고, 노후를 대비할 시간도 사라지죠. 무엇보다 가족들만 힘들게 할 뿐이에요. 제가 어디 한 번 나갈 때마다 가족이나 누군가를 불러야 하고, 뭐 하나 할 때마다 도움을 받아야 하잖아요? 가족이란 이유로 그 모든 행위를 강요하기엔 세월은 너무 길어요. 이제 30살인데 앞으로 60년을 그렇게 하라고요? 고작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 못해요. 미안해서, 그게 얼마나 힘든 줄 제가 해봐서 아니까요... 도움은 못 되더라도 짐은 되고 싶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그는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리고 내가 30이 넘은 지금까지 아버지는 집에만 계신다. 어릴 때는 당연한 줄 알았다. 엄마가 돈 벌고 아버지를 돕고. 세상 모든 아빠들이 다 그런 줄 알았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가 일반적인 부모들 이상의 헌신을 나와 언니에게 요구한다는 걸 깨달았다. 작은 일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집으로 호출되었고 낯선 사람을 상대할 때도 우리는 집에 불려가야 했다. 정말 어렸을 땐 몰랐다. 시각장애인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니 아니었다. 바깥세상과 소통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장애인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화가 났다.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식이 아닌 도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를 위한 삶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나이를 먹고 인생 자체가 버거워졌다. 이런 말 하면 불효일지도 모르지만 지긋지긋했다. 시력이 나빠져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의 빵을 사러 일부러 외출해야 했고 그 와중에 길을 잃기도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나는 배웠다. 내가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에 들어가는 순간 ‘쓸데없는 자존심’만 지킬뿐 남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을.

 20여년을 아버지를 돕고 나 또한 장애인이 되었다. 어디 가서 ‘부끄러운 가족은 되기 싫다’는 강한 욕망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한테 짐이 되기 싫다’는 의지가 나를 움직이게 했다. 머리와 심장 가까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자존심, 두려움, 걱정따위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이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가 움직이기엔 충분했다. 혹시 장애가 있는 동생이 언니 결혼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맘에 취직을 했고, 남편도 모자라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는 엄마한테 미안해서 길에서 듣는 상식을 벗어나버린 장애인을 향한 상스러운 욕설을 견뎠다. 그리고 독립했다. 가끔 카톡을 하고 전화를 하며 안부를 묻고, 중요한 일에 얼굴을 보고. 집에 갈 땐 먹을 것 하나 반찬 하나 해서 챙겨들고 가는 그런 딸이 되었다. 지천에 널린 여느 독립한 30대처럼.

 “언니는 나 대신 평범하게 살아. 이 지긋지긋한 시각장애인 세상에서 벗어나서, 평범하게, 그냥 어디에나 있는 흔해빠진 그런 보통의 가정을 꾸리고, 애도 낳고 행복하게 살아. 나는 어차피 내가 장애인이라서 평범한 가정을 아이한테 줄 수 없어. 재수 없으면 유전까지 되니까 나는 이 족쇄를 내 선에서 끊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언니는 빨리 결혼하고, 언니답게 살아.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언니 인생 살아. 물론 나도 가끔 도움은 받아야겠지만 형부랑 아이랑 살면서 내 걱정 안 될 만큼 내 앞가림은 할 거니까. 나는 엄마도 아빠도 입원하고 하면 몸으로 도와주기 힘드니까 푼돈이긴 하겠지만 바지런히 돈이나 모으고 있을게. 그러니까 엄마랑 아빠 무슨 일 생기면 잘 부탁하고. 나는 걱정하지 말고 살아. 알았지?”

 결혼을 준비하던 언니는 내 말에 울었다. 언니는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고 임신을 하고, 나는 이모가 되었다.

 나는 부끄럽지 않은 이모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엄마가 된 것도 아닌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자립한 것은 오늘날 태어날 조카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직접 번 돈으로 장난감도 사주고, 밝게 웃어주는 이모가 되고 싶었다. 장애인이 슬프고 불쌍한 게 아니란 걸 사랑하는 조카가 배울 수 있길 바랐다. 사실 이것말고도 더 큰 이유가 있다. 입에 담기조차 싫지만 만약 나중에 조카까지 나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면 역경 속에서 절망만이 있는 건 아니란 걸 알 수 있게 해주는 길잡이가 되어주고 싶으니까. 어떠한 역경이 찾아오더라도 괜찮다고 너도 할 수 있다고, 이모를 보라고 별일 아니라고 웃으며 등을 토닥여줄 수 있는 그런 이모가 되고 싶었다. 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빛나지 않더라도 1인분 해내는 이모. 와서는 안 될 그런 날이 조카에게 혹여 찾아온다면 두려워하지도, 방황하지도 않도록.

 - 나중에 애기 울음소리 영상 찍어서 보내줄게.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보내준 사진을 테디베어가 설명해 준다고 해도 언니는 내가 볼 수 없는 걸 보낸 것이 미안한 눈치였다. 비록 눈 맞춤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이모지만 누구보다도 너의 밝은 미래를 기원한다고,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나는 보이지 않는 사진 속 조카에게 속삭였다.

 신이여, 가녀린 어린 생명에게 축복을. 언니의 가정에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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