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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고즈넉 Nov 04. 2022

이제 그만 돌아가주십시오.

가을은 결실의 계절.. 결실의 다양한 모습들..

서울에서 나고, 서울에서 줄곤 자란 나는 전원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푸른 나무와 갖가지 농작물이 자라는 논밭, 느린 듯 하나 부지런한 시간의 흐름, 새의 지저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연과의 공감.. 이런 것들이 모두 나의 동경에 포함된다.


가을은 나의 이런 목가적인 성향에 진정 불을 지피는 계절이다. 사방이 빨갛고 노란 풍경들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세종시에 내려오고 나서 추수를 앞둔 논이 도심 속 은행나무의 그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예쁜 노란색을 띠고 있음을 알았다. 도심의 네온사인만큼이나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은 눈에 주는 피로감 없이 화려하다.


이러한 가을 풍광 속에서 내 눈길을 가장 잡아 끄는 건 감나무이다. 길가나 농가 옆에 무심히 서 있는 감나무이지만 달려있는 감들은 심상치 않다. 나무에 달린 많은 가지 중에 한 가지만 골라 잡아 대충 세어도 스물을 훌쩍 넘는다. 그 모습이 마치 손가락 마디마다 굵은 반지를 끼고 목에는 주먹만 한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여러 겹 레이어드하고 있는 힙한 래퍼 같다. 감나무 플렉스 flex~ 홍시 스웩 swag~

감나무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진다. 내 나무가 아님에도 괜히 배부르고 평화로워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눈도 배부르고 마음도 평화롭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연말을 앞두고 갖가지 실적을 챙기기에 바쁜 일개미이다. 연말 직무성과평가를 앞두고, 금년도 회계연도 마감을 앞두고, 연초 계획 대비 실적을 뽑아내기 위해 남은 4/4분기를 알차게 보내야 한다. 직장인들에게 가을은 아직 수확의 시기가 아니다. 혹독한 농번기가 진행 중이다.


주렁주렁 감들을 매달고 '퓨쳐 핸접~ put your hands up~'을 하고 있는 감나무를 보고 있자면 '나는 올 한 해 무엇을 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무원에게는 매년 이루어지는 근평(근무평정)과 그 결과들이 쌓여 승진이라는 결실로 돌아온다. 월급도 정해져 있고, 이직도 쉽지 않고, 복지혜택이나 성과급도 민간에 비해선 고만고만한 공무원 조직에서 사실상 승진은 인센티브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직급별로 근평 결과에 따라 전교 석차처럼 순위가 매겨진다. 승진 가능인원의 5 배수가 승진심사대상에 들게 되고 기대라는 흥분을 지나 결과라는 쓴 맛을 보게 된다.


조직 구조가 피라미드형 계층제이기에 함께 시작한 동기들과 계속 함께 승진 수는 없다. 피라미드 단계마다 쭉쭉 승진을 하며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일부이다.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승진 정체기를 지나 조직의 상황이나 업무의 성격에 따라 운이 좋으면 조직에서 정년을 맞게 된다.

하지만 중앙부처에서 정년퇴직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거처럼 흔한 일은 아니다. 정년 사수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용단을 내리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되는 일이 잦다. 특히 위로 갈수록 그런 상황은 빈번해진다. 부처에 장관은 단 한 자리, 차관은 조직규모에 따라 한두 자리이니 말이다. 차관 밑에 소위 1급(이제는 과거 1~3급을 묶어 '고위공무원단'으로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현장에서는 과거 용어가 많이 쓰인다.)인 실장 자리 또한 천 명이 넘는 거대 부처라 해도 열 손가락을 넘기 힘들다.


자기보다 아랫 기수 후배가 승진을 한다거나..

나이가 상급자보다 많다든가..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지만 결과는 같다.


너에 대한 조직의 평가는 끝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매일 그렇게 불러대더니.. 이제는 그만 돌아가라니.. 그럼 어디로 가야 하죠?)




푸릇 파릇한 어린잎 시절에는 모두 화려한 열매가 될 걸 꿈꾼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옷을 벗고 조직을 나가는 선배들과의 근무연수 차이가 줄어들 때마다 가을 풍경에는 열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바닥에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도 가을이다. 그 낙엽도 예전에는 한 줄기 햇살에 수줍던 연초록의 이파리였다.


내가 열매가 될지, 낙엽이 될지 아직은 모른다.

열매가 되면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가지에 한자리 자리잡고 매달린 열매보다는 바닥에 떨어지는 낙엽의 수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설사 늦가을 새들의 날개짓에도 우수수 속절없이 낙하하는 낙엽이 된다 하더라도 아등바등 들러붙는 '젖은 낙엽'은 되고 싶지 않다. 아직 물정 모르고 하는 배부른 소리라거나 철없는 말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다.(실제 그럴지도..)

하지만 나는 낙엽이 되더라도 귀여운 개구쟁이의 발 밑에서 '빠쌱~!'소리로, 까르르~ 웃음과 함께 스러지는 마른 낙엽이 되고 싶다. 나무 위가 아닌 바닥에 또 다른 가을을 수놓는 그런 낙엽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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