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애정에 대하여
개는 요새 애교가 많아졌다.
내가 소파에 앉아 있으면 개는 소파에 따라 올라와 내 옆에 앉는다. 그런 개가 기특한 나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엉덩이만 붙이고 있던 개는 점차 배를 깔고 앉고 등뒤로 누워 발을 들어 올린다. 개는 점차 긴장을 풀고 납작해진다. 딱 붙어 있기를 싫어하던 개는 내 옆구리께에서 몸을 붙이고 드러누워 나를 바라본다. 그러다 이내 눈을 감는다. 짐짓 코까지 곤다. 일 년 전과 비교하면 개는 우리와 많이 가까워졌다.
나는 사랑의 많은 이면 중 안타까워함을 싫어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쓰러움, 애잔함 같은 뒷맛이 슬픔과 맞닿은 감정이 싫다. 이러한 감정은 나에게 죄책감도 함께 불러일으킨다. 내가 더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
독일에 부모님이 방문했다. 그때 나는 아직 학생이었고, 졸업 논문을 빨리 써야 한다고 나를 들들 볶는 중이었다. 부모님은 3주 방문 후 이모들과 단체여행을 가기 위해 우리를 떠났다. 부모님을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혼자 펑펑 울었다. 내 예민함과 가난함으로 여행 내내 고단했을 부모님을 생각하니 맘이 편치 않았다. 그냥 공항에서 안녕하는 그 순간부터 눈물이 날 것 같아 참고 참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참지 못하고 울어버렸다.
어제저녁을 먹는 도중 문득 남편이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근 일 년 사이 남편의 회사에서는 세명의 사람이 해고당했다. 통보형식으로 해고 당해 하루아침에 없어진 사람들을 보며 남편은 황망해했다. 남편은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스킬을 배우는데 자신보다 훨씬 빠르다며 도태될까, 그러다 회사에서 내쳐질까 근심했다. 남편의 근심은 이내 나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미안했다. 내가 직업이 없음이. 오늘 아침 일어나 보니 남편은 집안 정리를 끝내놓고 개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시간이 좀 더 많은 내가 해도 될 일인데, 기꺼이 나를 배려하는 모습이 고맙다 못해 안쓰러웠다.
개는 요새 단단한 똥을 싸지 못한다. 똥을 싸는 횟수와 양도 줄었다. 산책 때마다 꼬박꼬박 똥을 싸던 개가 반도 안 되는 진 똥을 싸고 있으니 걱정된다. 내가 주는 싸구려 사료가 문제인지, 가끔씩 주는 빵이 문제인지, 여하튼 다 내 탓이고 나의 무지이다. 그럼에도 개는 잘 먹고 또 달라 짖고 내가 화장실을 가면 따라 들어오고 침대에 누우면 머리맡에 함께 눕고 싶어 한다. 물똥을 싸고 속이 부글부글해도 잘못먹인 주인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의 애정은 종종 안쓰러움과 연결되어 있어 내가 내 지인과 지견들을 애정하는 것이 미안할 지경이다.
내가 그들을 볼 때 나는 commitment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commitment는 종종 헌신, 약속, 전념하다로 해석되는데 이는 오랫동안 꾸준히 마음씀을 의미한다. 그들은 나를 먼저 속속들이 알고 나와 관계되기를 택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그들의 딸이었고 아내였고 주인이었다. 심지어 개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나를 찾아 지구 반대편으로 11시간을 굶어가며 날아왔다. 한 번의 선택이 그들의 몇십 년을 좌우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인연이 이토록 무거운 것이고 이 무거운 관계를 이어가길 선택해 준 그들에게 고맙다. 털어내면 훌훌 날아가버리는 먼지 같은 많은 관계 속에 나와의 인연을 진중하게 생각하고 노력하는 그들이 고맙다. 내가 단어의 무거움에 허덕이며 나는 단물만 빨아먹고 싶다고 사랑의 쓴 맛을 거부하고 얕은 관계만을 원할 때 그래도 진득하게 나의 얄팍함을 참아가며 곁을 내어준 그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