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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Apr 20. 2022

아들이 가방을 두고 온 날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

늘 그렇듯 아침이 되어서야 아이 가방을 찾는다. 아이 물을 바꿔주어야 하는데 가방이 없다.


나 : 단비야, 가방 어딨어?

아들 : 난 몰라. 기억 안 나. (요즘 난 몰라 기억 안 나 병에 걸려있음.)

나 : 지금 상황은 평소처럼 모른다고 할 상황이 아니야. 가방을 메고 왔는지 안 메고 왔는지만 생각해 봐. (출근시간이 임박했으므로 아이를 살살 달래야 한다.)

아들 : 음.... 메고 왔어.

나 : 그래? 메고 왔으면 집에 있겠지. 집이 지저분해서 안 보이나? 엄마가 다시 찾아볼게.


거기서 남편의 표정이 슬슬 험악해진다. 집이 지저분해서 가방을 못 찾겠다는 말도, 아이가 가방을 메고 오지 않은 것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넌 내 손바닥 안에 있어. 말 안 해도 다 알아.) 아빠 표정이 안 좋아지자, 긴장한 아이는 말을 또박또박하기 위해 입술을 벌렸다 오므렸다 하기 시작한다.


단비 : 사실, 내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가방을 메고 왔겠지. 어떻게 가방을 안 메고 왔겠어?

나 : 안 메고 올 수도 있어. 약을 많이 먹어서 머리도 멍하고, 오랜만에 학원 가방까지 메고 가서 깜박했을 수도 있어. 집에 없으니 학교 가서 잘 찾아봐.


그래도 아이는 계속 말한다.

"어떻게 가방을 안 메고 와? 어떻게 가방을 안 메고 오지?"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

"단비야, 아빠 화난 거 같으니까 가방 얘기 그만하자. "


아이 방과 후 가방 안에 생수와 필통을 넣어주었다. 나머지는 사물함에 두고 다니기 때문에 가방을 가져가지 않아도 수업 참여가 가능한 것을 남편은 모른다.


전 날 회식에서 도망 나오기 위해 급하게 마신 술이 깨지 않았다.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차를 두고 와서 택시를 불러야 하므로 출근에 늦을까 봐 불안했다.


아침엔 남편과 아들 둘 중 누군가가 나에게 무례하게 하더라도 참으려 한다.(늘 지켜지진 않지만.) 특히 아이 앞에서 남편에게 소리 지르지 않기는 반복해서 결심하게 된다. 아이는 자기가 혼나는 것보다 남편이 혼나는 걸 더 불안해한다.


아이 가방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이 집이 왜 지저분한지 그게 왜 나만의 탓이며, 나보다 늘 먼저 퇴근하는 사람이 왜 가방이 없다고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는지, 아이가 학교 인생 처음으로 학교 가기 싫다고 매일 떼를 쓰는데, 이제 육아휴직도 단 하루도 남기지 않고 다 써 버린 사람이라 출근해야 하는데, 아이가 아파도 하루 종일 학원 돌리는 게 마음 아픈데 아빠인 넌 아무렇지 않냐고, 아픈 아이를 달래서 학교를 보내는 게 먼저지 그깟 가방이 대수냐는 말을 조용히 고상하게 할 자신은 없으니까 입을 다문다.


나와 달리 아이는 아기 때부터 자기 물건을 잘 챙기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사실 난 취하지 않은 채, 술집에 가방을 두고 귀가한 경험이 있다.)

육아휴직 동안 나와 함께 살며 덜렁덜렁한 엄마를 닮아간 걸까? 딸 같은 아들이란 소리를 듣던 아이가 어느새 정체성을 찾아가며 아들의 뇌를 찾아가고 있는 걸까? 요즘 티브이와 게임을 많이 하다 보니 온통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라 깜박한 걸까? (기승전 게임 탓. 게임이 싫다.) 1학년도 아니고 3학년인데 가방을 두고 오다니. 게다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사실은 내 아들이 그럴지 몰랐다. 계속 머릿속에 아이가 또박또박 질문하던 게 떠오른다.


"어떻게 가방을 안 메고 올 수가 있어?"


누굴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공유했다. 너무 귀엽고 너무 걱정되어서. 동기 언니는 10살이 그런 건 너무한 거 아니냐며 걱정했다. '어머 어머 어머! 아들이라 그런 거니?' (아들이 다 그렇진 않을 텐데, 이 세상 모든 아들 부모님들께 사과드린다.)

친정엄마가 그 얘길 들으면 지 엄마 닮아 칠칠맞다고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시며 날 고단하게 할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남편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전달사항을 쓴다. 많이 보내면 정독하지 않을까 봐 그렇다.

'담임선생님께 연락 왔는데, 가방은 학교에 있대. 가방 안 가져온 거 우리 엄마한테 절대 말하지 마.'


그날 그 금요일 아침, 남편에게 내지르지 못해서인지 췌장이 쑤시는 기분의 연속이었다. 금요일 저녁도 토요일도 산불비상근무라 서로 마주칠 시간도 없었다. 늘 이런 식이다. 주관적으로 남편보다 큼직큼직한 잘못을 많이 하는 나라서 참아보자 한다. 질러댈 시간이 없어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경우가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췌장이 폭발하기 직전의 느낌이었지만 이틀 밥 해 준걸 먹으니 기분이 풀려버렸다. 토요일의 (맛이 이상한) 김치볶음밥과 일요일의 삼겹살. 그래, 내가 더 잘못하는 게 많은데 화내고 대화하기 귀찮으니까 넘어가자. 언제까지 이렇게 먹는 걸로 기분이 업 되며, 메신저로 중요한 대화를 전달하며, 한 번씩 바다를 가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4월에 바다를 못 갔으니 5월엔 가야겠지.)


블로그 글쓰기 모임에 이 이야기를 했더니, 한 언니가 말한다. " 괜찮아, 가방이 안 왔지만, 단비가 왔잖아." 역시, 이래서 글을 쓰든 안 쓰든 잘 쓰든 못 쓰든 글쓰기 모임을 사랑한다.


오늘 밤엔 아이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겠다. "그럴 수 있어. 괜찮아. 가방은 안 왔지만, 단비가 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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