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두 돌 지나고 직장어린이집을 보육기관으로 정했다. 0세부터 7세까지 여러 반씩 배정되어, 많은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좁은 계단과 거실에 아기들 냄새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수요에 비해 수용 가능 인원이 부족했기에 맞벌이 아니면 보내기 힘들었다. 많은 아이들이 기침이 나고 열이 나도 병원에 못 가고 등원하곤 했다. 아이 약 봉투와 투약의뢰서는 현관 앞 바구니에 놓게 되어있는데 그 바구니는 늘 꽉꽉 들어차 있었다.
휴가도 자주 낼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이 아플까 봐 놀이터도 키즈카페도 잘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전염병에 걸리면 등원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 수족구 걸렸을 때의 그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누군가에게 옮았을 수도 있고, 우리 아이가 먼저 누군가에게 옮겼을 수도 있다.
전염병에 걸리고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며칠씩 친정과 시댁에 번갈아 맡기고 출근한다. 늘 집콕으로 노력한 보상 따위 없이 결국 이렇게 돼버리면, 온 우주가 우리 아이 아프라고 도운 것처럼 세상 부정적인 엄마가 된다. 이 세상이 싫고 어린이집도 싫고 다 싫은 것이다.
그때 우연히 알게 되어 방문하게 된 병설유치원은 나의 로망이었다. 연령 당 배정된 반은 단 한 반뿐이었기 때문에 총 세 반만 있었다. 들어가면 쾌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입구에 아이들의 처방약을 쌓아놓는 곳도 없었다. 거실 같은 넓은 공간이 아이들 없이 텅 비어 있어서 무조건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살 때 병설유치원으로 옮겼다. (그 편리한 직장어린이집을 두고 옮긴 곳이, 커리큘럼과 식단이 뛰어난 사립 어린이집이 아니라는 것에 다들 놀라곤 했다.)
병설유치원은 예외 없이 4시까지만 보육을 해 주기 때문에 직장맘이 거의 없었다. 직장어린이집 다닐 때는 모든 행사를 저녁과 주말에 했는데, 이곳은 평일 낮에 했다. 모든 행사 때마다 휴가를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과 번갈아가며 휴가를 내서 딴에는 열심히 참석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께 나는 무심한 엄마, 아이 안 챙기는 엄마, 매번 아빠를 보내는 엄마일 뿐이었다.
학부모 상담 역시 매번 다른 이유로 아이에게 신경 좀 쓰라는 매정한 말만 들었다. 특히 다섯 살 때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교우관계에 대해 걱정하셨다. 솔직히 그때나 지금이나 다섯 살의 교우관계라니,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말씀을 무시해 버리면, 난 또 유일한 외동아이의 엄마이자 손에 꼽히는 직장맘으로서의 편견만 심어줄 것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혼자 노는 것을 염려했다. 외동이라서 그리고 낮에 엄마가 없어서 노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주말이라도 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조언에 대하여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우리 아이를 미워할까 봐 난 움직여야 했다.
누구한테 먼저 다가가거나, 먼저 친해지지 않는 내가 아이 학부모 단톡방에 들어가기 위해 애를 썼다. (등원을 거의 아이 아빠가 시키기도 했지만, 출근 전에 1등으로 등원시켜야 했기 때문에 다른 학부모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만큼 단톡방에 초대받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그 이후엔 주말에 아빠가 출근하는 집을 찾아냈다. 그래야 주말에 여행 가지 않고 엄마와만 놀 테니까. 그들과 주말에 만나 같이 놀게 했다.(덕분에 우리 집 남편은 집에서 쉬어야 했다.)
외동 확정인 엄마들이 모여있는 커뮤니티를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이 한 명만 데리고 다니는 것이 더 수월하다 보니, 함께 여행하자는 제안도 많았다. 거기서 경기도 여주에 사는 한 엄마와 연락이 되어서 아이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낯을 가리는 우리 아이가 처음부터 그 아이와 친해진 것은 아니다. 그 친구를 보자마자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기다려 주었고, 서서히 친해졌다.
육아휴직을 냈을 때는 시간이 많고 코로나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마침 그 아이의 엄마도 코로나로 재택근무 중이어서 평일에 자주 만났다. 사람 없는 바다와 산을 찾아 돌아다녔다. 둘은 쌍둥이처럼 꼭 붙어서 신나게 놀고, 그 아이 엄마와 나도 즐거웠다.
그래서 지금은? 내 생각은 여전하다. 다 부질없다. 아이는 이제는 내가 모르는 친구들과 스스로 약속을 잡아 놀기 바쁘다. 그때 만나고 헤어질 때 껴안고 울면서 헤어지던 그 친구들을 이제는 만나지 않는다.(만나려면 만날 수 있겠지만, 내가 함께해야 하므로 피곤해서 추진하지 않는다. )
한 번씩 생각한다.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고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엄마들이 모여있는 놀이방 딸린 갈빗집에 아이를 데리고 간 것. 내 이미지가 깍쟁이 같다고 해서, 다음에 안 끼워줄까 봐 푼수 떨고 잘 노는 척한 것(사실 지지리도 못 노는데).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그냥 채팅 한 번으로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들은 진짜 신기한 일이라는 것. 나로서는 대단한 용기다.
가끔 아이가 나에게 놀고 싶은 친구가 있을 때 그 친구 엄마에게 연락해달라는 부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해 주지 않는다. 난 안 친한 사람한테 먼저 연락하는 거 딱 싫어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 난 용기를 낸 게 맞을까? 일, 육아, 살림 그 어떤 것에도 중심을 못 잡고 버거워하던 때다. 선생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면 그게 더 용기 있는 엄마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만난 다둥이 엄마들, 외동 엄마들은 아직 나와 친구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곤 한다. 복직 후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의 생일을 챙기며 안부를 묻는다. 요즘 인스타를 안 했더니(블로그 하니까 게을러서 인스타까지 못 함 ㅠㅠ), 소식이 궁금하다며 연락이 온다. 복직해서 힘들 텐데, 급할 때 아이를 봐 주겠다고 말하는 엄마도 있다.
필요에 의해 불순하게 시작된 인연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이 쏙 빼고 누구 엄마 대 누구 엄마가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유난히 루저로 살아야 했던 그때 그 엄마들 세상에서 날 도와주던 고마운 그들을 생각하면, 그 이상한 용기가 아주 괜한 짓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