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쿠라는 매년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제물로 바쳤는데, 딸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승려는 신이 무자비하게 사람을 먹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몰래 신사에 숨어들어 제물 상자에 있던 아가씨를 돌려보내고, 대신 개를 넣어 두었다. 괴물이 나타나 상자를 열려고 하자, 개가 즉시 괴물을 공격했다. 괴물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바위굴로 도망갔다. 다음 달 피를 흘린 흔적을 쫓아가자, 굴 입구에 원숭이가 쓰러져 있었다.
<<이쿠라초지(伊倉町誌)>>에서 발췌
28.
로슌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지난해 타쿠마에서 패배하여 지쿠고(筑後)로 후퇴했던 로슌은, 겨울이 끝나자마자 재차 진격해 왔다.
그러나 로슌은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야금야금 군대를 움직여 차근차근 압박하였다.
동맹을 약속한 인근 호족들이 로슌의 움직임에 흔들리고 있었다. 몰래 편지를 보내어 호족들의 마음을 흔드는 모양이었다.
다케토모는 그들을 단속하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고, 기쿠치의 척후병들은 바빠졌다.
이윽고 유월이 되자, 로슌은 고시(合志)에 떡 하니 진을 쳤다. 그곳은 기쿠치의 바로 앞마당이었다.
순식간에 기쿠치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당장이라도 전투가 벌어질 것 같았지만 로슌은 여전히 느긋했다. 달포가 되도록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거니와, 마치 보라는 듯이 여유롭게 토성을 쌓았다.
기쿠치성은 또다시 포위되었다.
나는 다케토모를 재촉했다.
“다케토모, 연락은?”
“다들 농사짓느라 바빠. 지난해 전쟁하느라 크게 소모했으니, 어쩌면 당연하지.”
“지금이라도 본성을 옮기자.”
“그만해. 안 된다고 말했잖아.”
“그렇다면, 나는 여기까지다.”
나는 마음을 굳혔다.
수차례나 살아날 방법을 조언하였지만, 다케토모는 완고하게 거부했다.
기쿠치에서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고, 기쿠치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탐라에서 죽을 뻔한 나를 기쿠치가 살려주었다 해서, 기쿠치를 위해 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그도 나를 이용하려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 삼촌은 살기 위해 도망쳤고 의리를 지켰으며 허무하게 죽었다. 조 삼촌의 삶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나는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은 아니다.
나는 김중광에게 화살을 맞는 순간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연스럽게 살아났을 뿐이었다.
마침 탐라에 소란이 있었고, 마침 김중광은 나를 두려워했으며, 마침 나는 탐라에 배신당했다.
마침 나의 무력에 감동받은 왜국의 무사가 있었고, 마침 기쿠치는 용맹한 장수가 필요하였고, 마침 조 삼촌이 왜국의 무리에 섞여 있었으며, 마침 나는 조 삼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렇게라도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이 모든 우연에 인과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쿠치가 나를 살려주었다는 이유로 반드시 그에게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떠날 거야.”
“어디로?”
“고향.”
“글쎄? 괜찮을까?”
“여기나 거기나. 어차피 죽을 거라면 고향 땅에서 죽겠어.”
“죽는다니!”
“나를 붙잡고 싶으냐?”
“물론이지.”
“그렇다면 성을 옮기자. 타쿠마 평원 남쪽으로.”
“또 그 소리냐? 정말 지긋지긋하군!”
다케토모는 불현듯 칼을 뽑았다.
그의 눈동자에 물이 찼다. 다케토모는 전장에서 아버지와 여러 형제를 잃었다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여서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쫓겨났고 그는 일국의 영주가 되었다. 기쿠치는 천자를 모신 정서부의 최고 가문이다.
모자랄 것 없는 그의 어깨가 작게 보였다.
“칼을 뽑아!”
그는 검은 상자를 거칠게 내던졌다. 상자가 구르다 저절로 뚜껑이 열렸다. 칼 한 자루가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을 주워 천천히 뽑았다. 사르륵 소리가 부드럽고 경쾌했다. 도신(刀身)이 아름답게 물결쳤다.
엔주의 칼, 신검이었다.
나는 다케토모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진심이냐?”
“물론!”
“내가 이기면?”
“보내주지!”
긴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발을 구르며 동시에 내려쳤다.
다케토모는 손목을 흔들어 순식간에 비껴치고 목을 찔러왔다.
나는 고개를 숙여 피하는 동시에 다케토모의 배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벽까지 밀어붙인 후 칼을 버리고 양손으로 다케토모의 허리를 꽉 안았다.
다케토모가 빠져나오려 용을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의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리고 다른 쪽 다리를 걸어 찼다.
다케토모는 쿵 자빠졌다.
나는 칼을 다시 주워 그의 목덜미에 가만히 두었다.
녀석은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바투르! 가지 마! 혼자선 너무 벅차단 말이야! 제발 도와줘!”
“기쿠치성을 포기해.”
“그것만큼은…….”
한숨이 나왔다.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말했다. 나도 지긋지긋했다.
다케토모는 문득, 이상한 소리를 했다.
“팔월에 산신제(山神祭)가 있어. 신께 제를 올리고 무사 평안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거기에서 신검을 잡아줘. 그것만이라도 부탁한다.”
“신검?”
“그거. 엔주의 칼.”
“애초에 제례용 칼이었구나.”
“그래. 사실은 내가 만들라고 했어.”
“이딴 게 무슨 의미라고?”
“바투르, 영웅이 필요해. 너는 타쿠마의 영웅이잖아! 모두 좋아할 거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산신제라니, 일국의 영주가 그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믿는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네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아닌 건 아냐. 다케토모는 확신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다그쳤다. 헛소리!
그러자 다케토모는 오오우치의 별동대를 물리치던 날을 이야기했다. 그 많은 군세를 어떻게 물리쳤냐고 물었다.
그래, 나는 열세를 벗어나기 위해 천황의 위세를 빌렸다. 요시나리로 변장하여 병사들을 속이고, 그것으로 사기를 높였다.
나는 천황 따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을 신으로 받드는 병사들의 마음을 이용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슨 수라도 써야만 했다.
나는 그제야 다케토모의 부탁을 이해했다.
다케토모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귀향이 조금 늦어지겠지만 까짓거, 못 들어줄 이유도 없다.
그래, 그렇게 하자. 이것으로 마지막 한 조각의 미안함과 아쉬움까지 털어버리자.
다케토모와의 필연은 그것으로 끝내고, 우리의 관계를 다시 우연으로 돌리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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