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다케토모는 타쿠마평원(託麻原) 남쪽에 위치한 겐군궁(健軍宮)을 행궁(行宮)으로 삼아 태자를 모셨다.
조 삼촌과 나는 이곳의 예법을 따라 친왕에게 알현을 청했다.
다케토모는 태자의 옆에 곧게 시립하여 일국의 영주다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사냥하면 웃고 떠들던 다케토모는 여기 없었다.
“조 장군, 그대가 선봉이요. 바투르, 너는 겐군궁을 호위한다. 태자 전하를 부탁한다.”
형식적인 절차가 끝나고 무사들의 시간이 왔다. 조 삼촌, 다케토모와 함께 승리를 위한 치열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며칠 사이에 날이 선선해지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계절은 구월의 끝에 다다랐다.
로슌은 기어코 진군을 선택했다.
내심 싸움을 피하고자 하였던 조 삼촌은 로슌의 진격을 확인하고 나자 무척 날카로워졌다. 선봉장으로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으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진격을 앞두고, 삼촌은 내 어깨를 힘껏 잡았다.
“바투르, 살아서 보자. 네가 누구라고?”
“바투르요! 아단부카의 아들! 바투르!”
“그래, 너는 바투르다! 너는 대원의 장군이다!”
겐군궁 앞에서 다케토모와 삼촌의 출격을 지켜보았다. 내 뒤로는 백여 기의 기마가 대기 중이었다.
수적으로 불리하니 내가 나서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다케토모는 태자의 호위를 부탁하였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쟁에서 지면 태자고 뭐고 살려봐야 어떤 이득도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정서부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북조면 어떻고 남조면 어떤가?
왜국에서 의미 있는 것이라곤 조 삼촌과 다케토모뿐이다. 나는 태자가 죽더라도 다케토모를 살릴 것이다.
로슌 군대의 주장을 맡은 나카타카는 함정 가득한 강을 정면으로 밀고 들어왔다.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궁병이 일제히 시위를 당기자, 나카타가의 방패수들이 번쩍 방패를 올렸다.
우리는 시위를 당겼다 풀었다 반복하며 막상 화살을 쏘지는 않았다. 상대는 방패를 올렸다 내렸다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카타가의 병사들이 마침내 시라강(白川)에 몸을 담갔다.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깊이에 유속마저 느리다. 그러나 평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을 빼놓는다.
하물며 함정을 치워야 하고, 화살도 신경 쓰인다. 굴려 놓은 통나무를 넘을 땐 방패를 잠시 내려야 한다.
지치고 짜증 내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틈에 우리 궁병이 시위를 당겼고, 강에 시체가 하나둘 떠올랐다. 시라강은 빨갛게 물들었다.
창병 대기!
다케토모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나카타카의 군대는 시체를 헤치며 기어코 둔치에 이르렀다. 죽여도 죽여도 상대는 줄어들지 않았다.
붉은 강을 따라 적병의 눈동자도 빨갛게 물들었다.
창병 전진!
다케토모의 구령을 따라 도열해 있던 방패병 사이사이로 창병이 바짝 붙어 창을 내밀었다. 이어 궁병을 뒤로 물리고 대기시켰다.
드디어 충돌이었다.
나카타카는 무섭지도 않은지 방패병과 창병으로 이루어진 기쿠치의 고슴도치를 향해 무섭게 밀어붙였다.
창에 찔려 상당수가 쓰러졌음에도 힘이 줄지 않았다. 수적 열세는 좀처럼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때때로 궁병이 화살을 쏘아 도강하는 적병을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적병의 숫자는 조금도 줄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버티기조차 급급해졌다.
보병이 강 밖으로 점점 밀려나고, 나카타카의 병사들은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그러자 우리 군진과 시라강 사이에 말이 달릴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돌격!
삼촌은 힘껏 구령을 외쳤다. 대기하고 있던 삼촌의 기병대가 말을 달린다.
조 삼촌은 나카타카의 보병을 옆에서부터 허물고 들어갔다. 기쿠치의 보병을 상대하던 적군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손쉽게 허물어졌다.
나카타카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허물어진 자리를 새로운 병사들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조 삼촌의 뒤를 이어 다케토모의 기병대가 돌격하자, 적군이 스러지며 비명을 질러댔다.
두 차례의 돌격만으로 기세를 완전히 꺾어 놓은 것이다.
지축이 흔들린다. 삼촌과 다케토모의 연환 돌격은 멈출 줄 몰랐다.
삼촌이 돌격하고 빠져나와 크게 선회하는 사이 다케토모가 돌격을 감행하고, 다케토모가 빠져나오면 그사이 선회를 완료한 삼촌이 재차 돌격했다.
두 기마대의 돌격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았다.
고도의 기마 돌격 전술을 겪어 보지 못했을 나카타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했다.
나카타카의 병사들은 제멋대로 물러나며 엉키고 군진을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싸움이 이대로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로슌은 정말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나는 전장을 향하는 일단의 기마 무리를 발견하였다. 그 선두에는 오오우치가 있었다. 로슌의 별동대였다.
이번 싸움을 준비하며 척후를 게을리하지 않았건만, 우리는 로슌이 숨겨놓은 별동대를 놓치고 만 것이다.
조 삼촌과 다케토모는 아직 별동대를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별동대의 움직임을 가늠해 보았다. 조 삼촌이 돌격 후 빠져나올 즈음 오오우치에게 허리를 끊길 것 같았다.
그들이 기마돌격 전술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훈련된 기마병 무리가 도열하여 옆구리에 화살을 쏘아댄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삼촌이 화살에 맞아 굴러떨어지는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삼촌을 구해야 한다! 구원에 나서야 한다!
“전하를 지켜야 합니다!”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걸 눈치챈 부관 무사가 나를 재촉 했다. 요시나리 친왕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번뜩였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 전황도 불리하게 돌아간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역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안이 있다면 그건 하나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당백의 투지를 가진 전사들이었다.
“요시나리 전하의 칼과 갑옷, 투구를 가져와라. 어서!”
요시나리가 전장에 도착했을 때 삼촌과 나는 농담이 떠올랐다. 태자가 직접 전투에 나서면 병사들이 아주 하늘을 날겠다고.
나는 부관이 가져온 갑옷과 투구를 서둘러 입었다.
여기서 전장까지 반각도 안 될 거리. 오오우치의 기세를 단숨에 꺾어야 한다.
이윽고 나의 기병대를 돌아보았다. 침착해 보이는 표정 위로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단번에 내뱉었다.
“너희들이 누구냐? 기쿠치다! 기쿠치를 살려야 우리가 산다. 죽음이 두려운 자, 물러나라! 출정이다! 전력으로!”
한 손에 고삐를 쥐고, 다른 손으로 요시나리의 칼을 쥐었다.
오오우치의 별동대를 향해, 우리는 짓쳐 들었다.
한순간에 전장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오오우치가 멈칫하는 순간, 나는 칼을 번쩍 들었다.
“나는 정서장군(征西将軍) 요시나리다! 물러서지 마라! 끝까지 싸워라! 로슌을 짓밟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