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가을이 되었다. 히고의 광활한 평원이 노랗게 물들었다.
기쿠치는 수확한 곡식을 본성으로 수송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로슌이 가만 두고 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로슌은 기쿠치 북쪽 야마가(山鹿)의 산지를 차근차근 넘어오더니, 어느새 히고에 들어섰다.
기쿠치를 굶겨 죽이려는 로슌의 집요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나는 무사들의 시험 이후로 기쿠치의 지휘관이 되었다. 알고 보니 조 삼촌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단다.
다케토모가 무사들의 시비를 용인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지휘관 자격을 시험한 것이다.
영주와 사냥하러 다니는 것이 무사의 지휘관이 된다는 의미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번 수송 작전에는 나와 삼촌이 각각 백여 기의 기마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로슌의 군대가 시라강(白川) 가까이 접근했다. 황금빛 벌판으로 바람이 살랑거렸지만, 평화로운 풍경 위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로슌은 시라강 북쪽 후지사키 언덕(藤崎台)에 자리를 잡고 강 건너 우리를 지켜보았다.
로슌의 남동생 나카타카(中高)가 주장을 맡고, 오오우치(大内)와 오오토모(大友)가 가세하였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하였기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쳐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우리는 시라강 남부 타쿠마평원(託麻原)에 진을 쳤다. 조 삼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로슌의 군세는 우리보다 다섯 배나 되었다. 삼촌은 로슌이 작정하고 밀고 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내 생각도 같았다. 이만한 군사를 데리고 와서 얌전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조 삼촌은 충돌을 직감한 듯, 세심하게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조급한 눈으로 기쿠치성을 바라보았다. 어린 영주가 이끄는 본대는 강 상류에서 건너오기로 하였는데, 아직 소식이 없었다.
나는 로슌이 언제 갑자기 쳐들어올지 몰라서 밤에도 깊이 잠들 수 없었다. 로슌의 군대는 언제든 기습적으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가뜩이나 병력도 열세인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돌했다가는 궤멸당할 공산이 컸다.
게다가 우리는 상대를 몰아낼 뿐만 아니라 지키는 싸움을 해야만 한다. 곡식을 빼앗기거나 불타기라도 한다면 싸움에 이겼다고 이긴 게 아니었다.
하루 이틀 지나며 로슌의 진영에선 솥 연기가 짙어졌다.
삼촌은 불안감을 잊어버리려는 듯, 내게 전술을 상의하는 일이 잦아졌다.
“바투르, 여긴 트여 있어서 수비가 어렵다. 어떡해야 할까?”
“회전(會戰)이 불가피하다면 잘하는 걸 해야 합니다. 기마전이 좋겠습니다.”
“이유는?”
“한 해 동안 로슌의 군대를 지켜보았습니다. 병사 개개인의 무력이 뛰어나 그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병종이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기마병과 보병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기마대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합니다.”
“옳다. 그러나 기마전술을 모른다고 싸우는 법까지 모르는 건 아니다. 수적으로 불리하니 우리가 먼저 지친다.”
“쉽게 강을 건너도록 놔둘 순 없지요. 우리가 잘 준비해 놓았으니 제법 체력을 빼놓을 수 있을 겁니다.”
왜국의 전투는 신기한 구석이 있었다.
무사들의 드높은 자부심, 일족에 대한 충성심, 물러서지 않는 투지.
그러다 보니 로슌의 군대는 나카타카 부대, 오오우치 부대, 오오토모 부대가 서로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이러한 구조는 부대 단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부대는 하나의 무사에게 충성했다. 그래서 부대마다 기병과 궁병, 보병이 혼재했다.
무기도 통일되지 못하고 칼과 장궁, 방패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병종별로 나누지 못하니 그에 따른 전술이랄게 없었다.
게다가 기마돌격 전술을 잘 몰라서 기껏 말을 타고 온 뒤에 멈춰서 활을 쏘거나 칼을 휘두르기 바빴다.
백병전에는 유리할지 모르겠으나, 전장에서 이런 비효율적인 체계는 좋지 않았다.
집단 전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조 삼촌과 나는 지난 이 년 동안 기쿠치의 군사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했다. 병사는 기다란 창과 나무 방패를 무장시켰고, 궁병은 따로 조직했다.
기마대는 삼촌과 내가 직접 이끌며 신호체계를 가르쳤다. 효율적인 군사제도가 이번 싸움의 승부를 가릴 키가 될 것이다.
군사 체계만 바꾼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강과 둔치에 말뚝을 듬성듬성 박고, 사이사이에 가시나무를 널어두었다.
슌이 강을 건너려고 시도하면 궁병으로 활을 쏜다. 로슌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랴, 장애물 치우랴, 활까지 막아야 하므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적이 둔치에 도달하면 방패병을 도열한다. 창병은 방패병 뒤에 숨어서 고슴도치처럼 창을 뻗어 공격한다.
설령 로슌이 그걸 뚫어낸다 하더라도 체력이 부칠 것이었다.
병종을 나누어 전문적으로 훈련된 기쿠치의 군사를 로슌은 당해내지 못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거기에 기마 돌격을 가하면, 제아무리 로슌이라 하더라도 무너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적 열세가 심각한 현실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조 삼촌은 걱정이 많았다.
“저들도 바보가 아니다. 함정이 빤히 보이는데 들어오겠느냐?”
“병력 차이가 심하니 숫자를 믿고 들어올 겁니다. 만에 하나 함정을 피해 멀리 돌아온다면, 우리 기병이 강을 건너 본진을 쳐야 합니다. 난전을 만드는 겁니다.”
전쟁은 준비가 칠 할이다. 나는 병사들을 독려하여 함정을 보강했다.
강에 말뚝을 조금 더 촘촘히 박고 가시나무를 던져놓았다. 또 통나무를 준비해 둔치에서 굴렸다.
이쯤 되면 강을 건너는 것부터가 고역일 터였다.
로슌의 병사 몇이 몰려와 빤히 보면서 겁쟁이라 놀리곤 했지만, 그깟 저열한 도발이야 승리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요한 대치는 칠일 밤낮 이어졌다. 우리는 다가오는 전투를 준비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마침내 다케토모가 도착했다.
그가 늦은 이유가 있었다. 정서부(征西部)의 요시나리(良成) 친왕(親王)을 모시고 온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삼촌, 태자(太子)가 여길 왜 왔을까요? 친정(親征)할 만큼 여유롭지는 않은데.”
“그만큼 절실한 모양이지.”
“아무리 그래도…….”
“바투르, 저길 보렴.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겠다. 왜국의 문화다. 머리로 이해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렴.”
“친왕이 직접 싸우면, 병사들이 아주 하늘을 날겠습니다.”
“푸흡, 신소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