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무사들이 괴롭히지 않더냐?”
“별일 없습니다.”
삼촌은 간혹 안부를 물었다. 나는 약한 소리 하기가 싫어 대충 대답하고 말았다.
로슌의 악마를 처형한 이후 시비를 거는 무사는 거의 사라졌다. 오히려 눈치를 보는 자들이 많아졌다.
어쨌든 나는 모살밧의 악마에서 이제는 로슌의 악마를 처형한 대악마가 되어 무사들의 두려움이 되었다.
사실 나는 외로웠다.
이제 왜국의 말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여전히 대화는 어려웠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나와 말을 섞어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무룩한 내 표정을 보더니 삼촌은 빙그레 웃으며 딴소리를 했다.
“이방인인 내가 어찌 지휘관이 되었을까.”
“제가 어떻게 압니까.”
“당하지만 말고 골탕을 먹여 보거라.”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의외로 승복할 줄 아는 족속이다. 힘을 보여봐.”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요.”
“친구라도 만들던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한다.”
삼촌은 무언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대악마가 된 나를 괴롭히려 드는 자는 이제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 만큼은 정곡을 찔렀다. 나는 외톨이였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 집을 나섰다.
기쿠치성이 꽤 익숙해졌지만, 탐라와는 다른 풍경과 분위기가 아직도 신기했다.
발길 따라 걷다 보니 시냇가에 이르렀다.
또래로 보이는 귀공자가 제 키만 한 장궁을 손질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나무를 여러 겹 붙여 만든 목궁(木弓)이었다.
잠시 지켜보다가, 그의 손길에서 반가운 것을 발견했다.
나는 재빨리 다가가 알은체했다.
“부레풀이다! 맞지?”
“뭔데?”
“부레풀 맞지?”
“맞는데. 어쩌라고.”
“조금만 줄 수 있어?”
“귀한 거야.”
“조금이면 되는데.”
“뭘 하려고?”
“각궁을 만들 거야.”
“쉽지 않을걸? 아교가 금방 녹는다.”
“너도 목궁에 아교를 바르고 있잖아.”
“나무는 잘 붙어. 안 떨어져.”
“각궁도 마찬가지야.”
“부레풀을 가지고 싶은 모양인데, 소용없어. 귀한 걸 쓸데없이 낭비하기 싫다.”
“만들면 너도 하나 줄게.”
귀공자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정말이니?”
“정말이다.”
“무사의 명예를 걸고?”
“아버지의 명예를 걸겠어.”
“이름이 뭐니?”
“대원의 만호, 아단부카의 아들 바투르다.”
품에서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 탐라만호를 상징하는 금패를 꺼내어 들었다.
왜 그걸 꺼내 들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외톨이였던 나를 보증해 줄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내가 나를 증명하는 방식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금패를 꺼내 보이는 것이라니 스스로도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나는 본명 대신 별명을 말했다. 무의식중에 그러한 것이지만, 별명을 내뱉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활짝 웃었다.
“원나라의 신분패로구나! 좋아, 부레풀을 주지. 대신 물건이 형편없으면 금패를 가져가겠어. 나는 기쿠치 다케토모다.”
이런, 그는 정서부의 미래를 짊어진 기쿠치 가문의 어린 영주였다.
영주씩이나 되는 자가 어째서 홀로 개울가에 앉아 활을 정비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이 떠오르며 당황하는 사이, 다케토모는 주먹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치고는 등을 돌려 내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나더러 보라는 듯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이었다.
동시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사방에서 가신들이 튀어나와 영주의 뒤를 수행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영주를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었다. 영주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와의 약속은 가벼울 수 없었다.
다케토모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혼신을 다해 각궁을 만들었다.
마침내 완성된 활을 다케토모에게 진상하자 그는 다루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며칠에 걸쳐 활을 가르치는 사이 기쿠치에 또 소문이 돌았다. 영주가 악마에게 혼을 팔았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케토모는 녹각궁을 좋아했다.
각궁은 왜국의 목궁에 비해 작고 가벼웠다. 그런 주제에 백 보 이상을 쏘아 보낸다.
전장에선 무기에 목숨이 달렸다. 전쟁 중인 왜국의 어린 영주가 성능 좋은 무기를 싫어할 리 없었다.
봄이 되면서 나는 다케토모와 함께 사냥을 다니곤 했다.
목궁에서 쏜 화살은 천천히 날아 활공하듯 내려앉았다. 예민한 동물은 소리를 듣고 피해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삼십 보 안에서 쏘아야 했다.
하지만 녹각궁은 백 보 밖에서도 순식간에 날아가 꽂혔다. 목궁보다 사냥이 쉬워져 다케토모는 무척 즐거워했다.
우리는 주로 멧돼지와 사슴 따위를 잡은 후 기쿠치의 무사들에게 나눠주었다. 고기가 귀하여서 다들 좋아했다.
다만 일부 무사들은 대악마이자 영주의 친구가 된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며 노골적으로 피했다.
조 삼촌은 조금 황당해하였다.
“친구를 만들랬더니, 영주를 꼬셔?”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각궁은 쓸만하더냐?”
“그럭저럭 이요.”
“관리하기 까다로울 텐데?”
“어차피 두 정(丁) 뿐인걸요.”
“영주가 더 만들어달라 하지 않든?”
“그렇지 않아도 두세 정 더 만들었는데, 관리를 못해서 금방 떨어집니다.”
“명주실로 단단하게 묶어주지 않고.”
“왜 안 그랬겠습니까. 화살도 따로 만들어야 하니 영 불편한가 봅니다.”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튀지 말거라. 새로운 무기체계를 갖추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단다. 여긴 튀는 사람을 미워해. 시기하는 녀석이 생길 거야.”
“제가 뭐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왜들 그런답니까?”
“탐노야, 화살과 아교는 백성들이 바친 것이다. 그걸 마음껏 쓰고 있지 않느냐?”
“탐노가 아니고, 바투르요.”
내가 이름을 정정하자 조 삼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소리가 점점 는다. 걱정해서 하는 소리겠지만 영 듣기가 싫었다.
삼촌이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삼촌의 우려가 곧 사실로 드러나 적잖이 당황 했다. 꼴에 무사라는 작자들이 속은 아주 소갈딱지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