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낯선 왜국의 땅, 기쿠치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냈다.
규슈의 말과 생활 양식을 익히는 데 애를 먹었지만, 그보다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어딜 가든 텃세는 있나 보다.
나는 열다섯이 되었고, 키도 한 뼘이나 자라서 이제는 어지간한 어른들보다도 덩치가 커졌다.
왜국에는 각궁이 없고 나무를 붙여 만든 목궁이 전부였다. 나는 각궁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규슈는 겨울에도 습한 편이어서 물소뿔이 아교에 잘 붙지 않았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물소뿔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에서도 물소뿔은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다 썼기 때문에 어지간한 신분이 아니고서는 흑각궁을 소지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탐라에서 쓰던 녹각궁을 만들기 시작했다.
탐라도 만만치 않게 습한 동네였다.
녹각(鹿角)은 물소뿔에 비해 아교가 잘 붙었다.
마침 규슈엔 ‘시카(鹿)’라는 사슴이 살아서 뿔을 구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래서 새벽녘이 되면 산에 들어가 탈각된 사슴뿔을 주웠다.
가공의 어려움만 극복하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부레풀(魚膠)을 구할 길이 없어 사슴 가죽으로 아교(阿膠)를 만들기로 했다.
그러려면 많은 땔감이 필요해서 나뭇가지와 낙엽, 마른 똥 따위를 잔뜩 모았다.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정작 솥이 없었다. 낯선 타지에서 혼자 힘으로 무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 삼촌은 어찌 된 일인지 기쿠치 일족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다.
원나라 원정대의 무서움을 맛본 규슈 영주들이 삼촌의 전략과 기마전술을 배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삼촌에게 부탁하면 아교든 솥이든 구해줄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부탁하기가 꺼려졌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그런데 각궁을 만들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안 좋게 소문이 났다.
기쿠치에선 나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관심거리로 전락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특히 왜의 상급 무사들은 내가 정말 아니꼬웠나 보다. 아주 작정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쓸데없는 짓이야. 여기도 활은 있어.”
“왜궁(倭弓)은 익숙지 않소. 너무 크고 무거운 데다 멀리 나가지도 않잖습니까?”
“근성 없는 녀석! 핑계 대지 마라.”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내 품 들여 만드는데 어째서 시비를 겁니까?”
“너는 규슈를 몰라. 여긴 습해서 아교가 금방 녹아버리지.”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건방진 녀석! 한 마디를 안 지는구나.”
왜의 무사들은 덩치가 작아서 맞붙으면 한주먹 거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처지를 되새기며 되도록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기쿠치성에 도착한 그날부터 무사들의 시비는 꾸준히 이어졌다.
나에 관한 소문이 기쿠치성에 퍼지면서 그들의 호승심과 자존심을 동시에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빨간 모래밭에서 솟아난 악마가, 다친 몸으로 이쿠라의 객관에서 네 명의 무사를 죽였다는 식의 과장된 이야기였다.
나는 그런 소문에도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았는데, 나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간혹 왜국의 무사들끼리 서로 용기를 겨루며 내기처럼 시비를 걸어와도 함부로 주먹을 내밀지 않았다.
기댈 곳 없는 타지에서 분란이 생겨봐야 나만 손해였다.
조 삼촌은 여기에 새 삶이 있다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고려나 왜국이나 서로 구분하고 갈라치는 모습은 똑같았다.
하지만 조용히 지내고 싶은 마음은 욕심이었나보다.
지난해부터 겨울을 지나는 동안 별일 없이 편안하여서 기쿠치가 북조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어느샌가 잊고 있었다.
나는 조 삼촌의 부름을 받고 기쿠치성 망루에 올랐다.
삼촌은 나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곧 소란이 있을 것이다, 기쿠치는 너를 전장으로 보내고자 한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거렸다.
탐노야…….
삼촌은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고는 다시 한숨 쉬기를 반복했다.
기쿠치가 나를 전장으로 보내려고 한다.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쓰임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나의 무용에 반했다는 뜻은 결국 나를 사지로 몰아넣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왜놈들은 나를 칼받이로 써먹고 죽어도 아깝지 않은 도구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거라. 삼촌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마치 가여운 걸 보는 눈빛이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삼촌이 예상한 대로 소란이 일어났다.
로슌은 아직 본대를 끌고 오거나 하는 등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지만, 소규모의 군사를 보내 이곳저곳 약탈하고 괴롭혔다.
기쿠치로서는 그런 사소한 싸움마저도 타격이 커서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기에 군사를 편성하여 요격에 나섰다.
로슌은 애초에 전투를 벌일 계획이 아니어서 치고 빠지는 식으로 전술을 구사했다.
기쿠치가 요격에 나서면 일찌감치 물러갔다가 다른 곳을 치거나, 사나흘 후 다시 와서 공격하는 식이었다.
모든 지역을 미리 방비할 수 없어서 점점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기쿠치는 여기저기 군사를 뿌리느라 본성이 비는 일도 간혹 생겨났다.
십팔외성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기쿠치 본성이 공격받을 일은 없어야 마땅하겠지만, 싸움이라는 게 예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한정된 병력으로 사방팔방의 침입자를 쫓아내느라 십팔외성의 방비도 간혹 허술해졌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로슌의 장수는 온몸에 피칠을 하고 본성 앞에 나타났다.
그는 양손으로 쥐어야 할 대태도(大太刀)를 한 손으로 가볍게 잡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휘둘렀다
이윽고 그는 본성을 향해 뭐라 뭐라 소리를 쳤다. 병사들은 그가 로슌이 키운 악마라면서 두려워했다.
악마는 악마로 잡아야지. 조 삼촌은 이 상황에 농담을 지껄였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니 삼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저자를 쏘아 맞힐 수 있지만 너에게 기회를 양보하겠다. 자, 어떠냐?
나는 대답했다. 저를 모살밧의 악마라 부른다지요? 창을 주세요.
삼촌이 건넨 창을 들고 망루를 내려갔다.
로슌의 악마라고 불리우는 저자가 차쿠르 아저씨나 관음보 삼촌보다 잘 싸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무서울 게 없었다. 홀로 창을 쥐고 성문을 나섰다.
피칠갑을 한 로슌의 무사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 뒤로 수십 기의 기마병이 늘어섰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홀로 달려 나갔다.
기쿠치는 내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위태로운 순간에 한 번 써먹으려는 수작이었다.
아마도 적병에게 생채기라도 내주길 바라고 있겠지만, 나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줄 의향이 전혀 없었다.
마상 전투는 일반적인 싸움과 다르다. 찰나를 다루는 싸움이다. 순간적인 판단과 움직임이 승부를 가른다.
아주 약간의 우세만으로 삶과 죽음이 갈리고, 그것을 위해 온갖 속임수를 아끼지 않는다.
나는 창을 짧게 잡고 일부러 옆으로 펼쳤다. 쭉 뻗은 창이 길게 늘어졌다.
적장이 내가 내뻗은 창에 익숙해질 무렵, 이번에는 창을 옆구리에 끼고 앞으로 곧게 뻗었다.
로슌의 악마는 대태도를 힘차게 휘둘렀다.
나는 짧게 잡은 창을 순식간에 끝까지 내밀어 길게 뻗었다. 원래 잡았던 길이보다 팔 하나를 더 길게 잡은 것이었다.
로슌의 악마는 마치 창이 갑자기 늘어난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는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목을 관통당하여 쓰러졌다. 모든 순간이 조금도 긴장되지 않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수십 기의 기병들 속으로 돌격해 들어가 창을 돌리고 휘둘렀다.
나를 써먹겠다고? 내 목숨은 내 것이다. 누가 써먹고 죽이고 할만한 게 아니었다.
나의 삶은 나의 것이고, 오늘 나는 죽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살 것이다. 로슌의 무사들을 베고 또 베어, 실력을 증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날 것이다.
기쿠치, 네가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나는 수십 기에 달하는 로슌의 기마무사를 모두 쓰러뜨렸다. 피칠을 하고 온 로슌의 악마는 사라지고, 땅을 피로 물들인 모살밧의 악마만 홀로 남았다.
창을 늘어뜨리고 기쿠치성을 노려보았다.
기쿠치성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보았느냐, 전장에서 누가 진짜인지 똑똑히 목격하였느냐! 그 누구도 내 삶에 간섭할 수 없어. 기쿠치, 너는 나를 이용할 수 없어!
창끝으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것이 흙을 적시고, 내 마음은 붉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