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자쿠구순(1)

by 상재
탐라 동도(東道)의 카치 조자쿠구순 등은 아직도 수백 명을 거느리고 성에 웅거하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최영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자 적이 무너져 달아났다.

<<고려사>> 권133, 열전26, 최영(崔瑩).




20.


“빠가야로!”


욕지거리가 들린다.


눈을 뜨니 청명한 하늘과 하얀 구름 조각이 보였다. 구름처럼 나도 두둥실 떠 있는 느낌이었다.


흘깃, 왼쪽 어깻죽지에 화살 깃이 보였다. 김중광의 화살이 어깨를 관통하여 깃대까지 박힌 것이다.


그리고 손발이 묶여 있었다. 굳이 묶지 않아도 온몸이 쑤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을 텐데.


나는 왜구에게 붙잡혀왔다. 저자들이 나를 살려 데려온 이유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 이유를 찾으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버렸다.


앓는 소리를 들었는지 왜구 하나가 다가와서 거칠게 일으켰다. 나는 욕지거리를 내뱉던 적장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먼바다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 끝에 고려 함선이 보인다. 말미의 왜선 하나가 미처 속도를 내지 못하고 고려선에 붙들린 모양이었다.


적장은 쯧 혀를 차고는, 누군가를 부르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불려 온 사내는 다른 왜구의 무사들과 달리 기골이 장대하였는데, 긴 머리를 뒤로 모아 깔끔하게 묶은 모양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왜적들과 조금 다르면서도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혹시 문 만호의 아들 아니냐?”


고려말이 튀어나오자 나는 놀라서 눈이 절로 크게 떠졌다. 그는 나를 아는 듯했다.


나를 아시오?


그는 반갑게 말했다. 삼촌을 모르겠느냐?


나는 그제야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를 만호 형님 하며 따르던 자쿠구순, 동아막 조 삼촌이었다.


아는 채를 하자 삼촌은 상황부터 정리하자며 왜국의 말로 적장과 몇 마디를 나누었다.


곧 적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은 갑판 구석으로 날 이끌더니, 포박을 풀고 어깨에 박힌 화살을 잘라 뽑았다.


그리곤 어디서 났는지 고약을 어깨 구멍에 붙이고 기다란 삼베를 둘둘 감았다.


삼촌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물었다.


어쩌다 다쳤느냐?


김중광 목사가 쐈어요.


그자가 왜?


나는 그간의 사정을 간단히 말했다.


갑판 귀퉁이에 등을 기대니 바닷바람이 산뜻했다.


삼촌은 무심하게 말했다. 고생이 많았구나.


나도 물었다. 삼촌은 어쩌다 여기에 있나요?


삼촌은 허탈하게 웃었다.


“망할 영감탱이! 최영 말이다. 이 년 전 그날, 나는 최영에게 쫓겨서 바다로 도망 나왔다. 도망치느라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일단 배부터 띄웠지. 정신 차리고 보니 왜국(倭國)이었어.”


삼촌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최영의 토벌 당시, 동아막도 기병 오백으로는 토벌대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미리 준비해 둔 배를 타고 무작정 바다로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왜국으로 흘러가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다.


나는 삼촌의 이야기가 끝나자, 왜구가 나를 잡아 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삼촌은 말했다. 이자들은 무(武)를 숭상한다, 너의 무용(武勇)을 인정한 것이란다.


삼촌은 그밖에도 왜국의 사정을 알려주었다.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큰 틀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왜국(倭國)이 남북으로 쪼개어져 전쟁 중이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처음 보는 섬과 대륙이 보이기 시작했다. 삼촌은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명을 알려주었다.


함선은 고토(五島)를 지나 시모섬(下島)와 가미섬(上島)를 거쳐 아리아케해(有明海)에 들어섰다. 탐라를 떠난 지 하루 만에 규슈(九州)에 이르른 것이었다.


함선은 기쿠치강(菊池川) 하구 이쿠라(伊倉)에 다가갔다.


수백 척의 배는 가지런히 정렬하여 지친 병사들을 토해냈다. 패잔병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우리는 이쿠라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였다.


나는 어깨의 상처가 꽤 깊어서 좀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삼촌은 엄살 부리지 말라며 손바닥으로 등짝을 툭 쳤지만, 말과는 다르게 따듯한 물과 깨끗한 삼베를 구해와 상처를 보살펴 주었다.


식사 거리를 방까지 직접 가져다주면서 나를 배려해 주었기에 너무도 감사한 마음이었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삼촌은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왜국은 현재 북조(北朝)의 아시카가(足利) 일족과 남조(南朝)의 정서부(征西部)로 나뉘었는데, 우리의 목적지는 정서부를 모시는 기쿠치 가문의 영지였다.


삼촌은 우연히 규슈로 흘러들어와 기쿠치 가문의 눈에 띄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정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반쯤은 흘려들었다. 왜구가 나를 살려서 데려온 이유를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살려주었다기엔 좀 어색하구나. 너는 자유의 몸이 아니다. 조만간 너 자신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삼촌은 그런 나의 의문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삼촌은 식사를 마친 후 대장을 만나고 오겠다며 나갔다. 나는 아프고 지친 몸을 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설핏 눈이 떠졌다.


진득한 살기.


죽을 뻔하였던 나는 아직도 바짝 긴장한 상태였고, 낯선 땅에서 무척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잠결에도 수상한 기척을 알아채고 본능적으로 눈이 떠진 것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옷자락, 살금 걷는 진동, 소곤거리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삼촌 칼을 뽑아 들고 침대 밑으로 숨었다.


이윽고 살짝 문이 열렸다. 네댓 명이 슬쩍 들어와 조용히 문을 닫는다.


뭐라 뭐라 지껄이는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그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사내들은 방을 둘러보고 침대를 뒤적거리다가 여기저기 숨어들었다.


그중 하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갑자기 바닥에 엎드렸다. 침대 밑에 숨으려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눈이 크게 떠지고, 너무 놀랐는지 헛바람을 삼키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나는 곧바로 녀석의 목에 칼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사내는 가슴을 들썩이며 딸꾹거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이들이 누군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를 노린 자들을 곱게 보내지 않는 것뿐이었다.


딸꾹질하는 사내를 인질로 삼아 침대 밖으로 천천히 나왔다. 그러자 각자 숨었던 사내들이 나를 포위하며 둘러싸곤 칼을 빼 들었다.


한 뼘 길이의 작은 칼이어서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작은 칼로 긴 칼을 상대할 순 없다. 수적 우위만으로 무기의 이점을 상쇄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자들은 나를 너무 우습게 보았다. 나는 씨름으로는 관 삼촌과 대등하고, 칼싸움은 차쿠르 아저씨와 비등했다.


두 아저씨는 위대한 전사였다. 나는 모래사장 위에서 왜구를 상대로 압도적인 무위를 선보임으로써 두 아저씨의 용맹을 덩달아 증명하였다.


벽을 등지고 서서 침입자를 어떻게 처리할지 머릿속으로 순서와 동작을 그려보았다.


하나에 인질을 밀치고, 둘에 왼쪽 사내의 허벅지를 긋고, 셋에 가운데 사내를 찌른다. 마지막 남은 녀석은 시간문제였다.


나는 계산한 대로 움직였다.


인질을 가운데 녀석에게 밀침과 동시에, 인질의 목덜미를 칼로 그었다.


가운데 녀석은 인질과 부닥치며 뒤로 물러났다.


이어 당황한 왼쪽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가 허벅다리를 그었다. 그는 상처를 입고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가운데 녀석을 마주 보았다.


그는 인질과 부딪치느라 겨우 자세를 잡은 상황이었기에 경황이 없어 보였다. 나는 즉시 복부를 찔렀다.


넷 중 셋이 순식간에 상처를 입고 나뒹굴었다.


하나 남은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칼을 떨어뜨리고는 손바닥을 보이며 양손을 들었다.


녀석들이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궁금했으나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기에 물어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나를 암살하려던 자들을 곱게 살려 보낼 수도 없었다.


이내 결심하고 녀석들의 목을 베려던 순간, 밖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조 삼촌이 달려 들어왔다.


탐노야! 그만!


삼촌은 얼른 들어와 나를 제지하더니, 왜국의 말로 크게 소리쳤다.


사내들은 사색이 되어서 피 흘리는 몸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삼촌은 다시 얼마간 크게 혼을 내고는 사내들을 돌려보냈다.


나는 소리쳤다. 그냥 보낼 수 없어요!


그러자 삼촌은 작게 타일렀다.


“네 처지를 생각하거라. 자유의 몸이 아니다. 광치기 모살밧(모래밭)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 말단 무사들의 동료가 흘린 핏물이다. 그러니 저들의 복수는 정당하단다. 알겠니? 네가 어떤 곳으로 끌려왔는지.”


새삼스레 내 처지를 깨달았다.


포로 신세가 당연한 것을, 삼촌 덕에 상처를 치료받고 보살핌받았더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 버렸다.


삼촌 말이 맞다. 여기서 살아가려면 나를 증명하고 인정받아야 했다.


어쩌면 탐라에서보다 더한 괴롭힘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나를 죽이려는 자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걱정이 되진 않았다.


나의 무용을 인정하여 데려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실력을 보이면 될 일이다.


적어도 원의 핏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진 걸 빼앗고 핍박하진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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