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왜구는 주로 동쪽에서 나타났다.
성주 어른은 왕자 문신보 어른을 불러 의논하는 일이 잦아졌다.
왕자 어른은 탐라 동남부의 토산(兎山)에 머물면서 동부 일대를 방호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함덕(咸德)으로 옮겨왔다.
함덕은 탐라의 주요한 바닷길이어서 이곳을 지키지 못하면 피해가 크기 때문이었다.
수확이 끝난 어느 날, 여명의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에 연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새벽녘 경계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왜구가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성주 어른은 급하게 나를 찾았다.
탐노! 출정이다!
순간 김중광의 서슬 퍼런 경고가 떠올랐지만,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떨쳐버리고 사병을 이끌었다.
왜구는 탐라의 동쪽 끝 광치기 해안의 모래사장에서 진을 꾸리고 있었다.
이백여 척이나 되는 왜선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수천 명의 왜구가 모래사장을 촘촘히 채우고 있었다.
나는 성주 어른과 함께 일백 기병을 이끌고 도착하여 왜구의 무리를 살폈다. 왜적의 기병이 대략 이백 정도가 보였다.
나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였다.
왜구의 목적은 약탈. 싸우기보단 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략. 목표는 곡식과 재물. 기병의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는 보병의 호위.
저들을 쫓아낼 방법은 호위 기병을 제압하는 것.
수천의 왜구와 싸울 수 없으니, 왜구 기병을 따로 유인하여야 한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어차피 뒤가 없어서 무슨 수라도 써야만 했다.
생각을 마치고 성주 어른에게 일렀다.
왕자 어른께 전령을 보내어 다랑쉬 오름 분화구에 궁병을 숨겨두라 전하세요. 오름 밑에 갈아탈 말도 준비해 두라 하세요. 저는 왜구 기병을 유인하여 사시 초까지 다랑쉬로 가겠어요. 여기서 이식(二息, 60리) 거리이니 충분할 겁니다.
그리고 나는 차쿠르 아저씨의 말을 떠올렸다. 왜구와 상대할 때는 우두머리를 치라고 하셨다.
신중하게 시위를 당겼다. 거리는 이백 보. 각궁이 제아무리 멀리 쏜다고 할지라도 어지간한 궁수라면 백 보를 맞추기 힘들다.
나도 이 거리에서 적장을 죽일 자신은 없었지만, 그러나 바람을 잘 타면 어디든 맞혀서 떨어뜨릴 자신은 있었다.
석 삼촌과 매일 하던 놀이가 이백 보 거리의 표적을 맞히는 것이었다.
나는 바람을 기다렸다. 질서 없이 사방으로 불던 바람이 어느 순간 동쪽으로 휙 방향을 틀었다.
쥐어짜이며 끼익 신음을 내던 녹각궁은 갑자기 속박을 풀고 탕, 경쾌하게 소리냈다. 화살은 곧 불어닥친 바람에 올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갔다.
뒤늦게 화살을 발견한 병사 하나가 화살을 가리켰다. 적장이 그것을 발견한 것은 화살이 제 허벅지에 박힌 이후였다.
왜구 기병은 저마다 제 키만 한 목궁을 당겨 쏘아 대응했지만 고작 오십 보에도 이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나는 놀리듯 천천히 말머리를 돌려 속보(速步)로 달렸다. 그러자 왜구 기병이 나를 쫓기 시작했다.
그들이 백 보 근처까지 쫓아오자 나는 구보(駈步)로 전환하여 속도를 올렸다. 벌써 눈앞에 알오름이 보였다.
나는 사병을 이끌고 알오름 뒤편으로 숨었다.
알오름 바로 옆에는 두산봉이 있어서 두 봉우리 사이가 마치 협곡 같았다. 매복하기 좋은 곳이었다.
왜구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진입하지 않고 산세를 살폈다.
나는 병사들을 이끌고 오름 정상으로 올라가, 진군을 멈춘 왜구 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내리막을 내달리는 기분은 마치 땅으로 처박히는 것 같은 공포감이 들었으나 사병들은 용감하게 따라왔다.
갑작스러운 돌격을 발견한 왜구의 기병 무리는 그러나 긴급하게 회동하며 돌격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대처하는 모습만 보아도 약탈이나 일삼는 해적무리는 아니었다. 틀림없이 오랜 전투로 단련된 정예병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도 내리꽂는 기병의 속도와 질량은 훈련과 경험만으로 맞설 수 없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선두에서 창을 휘두르며 왜구 무리의 허리를 끊었다. 뒤이어 사병들이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구 수십 명이 낙마하여 나뒹굴고, 그들의 비명이 오름 위로 퍼져갔다.
짧은 순간의 충돌이었음에도 제법 손해를 입힌 것이다. 내 인생에서 얻은 첫 번째 승리였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승리에 도취 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대로 속도를 올렸다.
알오름에서 다랑쉬까지는 이각(二刻) 거리. 약속한 사시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다.
나는 왕자 어른이 시간을 잘 맞추기를 기도하며 다랑쉬를 향해 질주했다.
왜구는 알오름을 한 바퀴 돌아 나와서 곧장 쫓아왔다. 한방 크게 먹었음에도 기세가 줄지 않아서 만만치 않게 느껴졌다.
드디어 다랑쉬가 보이기 시작했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머릿속으로 전술을 그려보았다. 다랑쉬오름은 큰오름과 족은오름이 사이좋게 앉아 있었고, 큰오름엔 분화구가 있었다.
나는 오름 사이를 가로질러 족은오름에 오를 것이고, 앞서와 마찬가지로 내리막을 이용하여 돌격할 생각이었다.
이것이 초 삼촌과 매번 하던 꼬리물기 놀이였다. 왕자 어른이 시간에 맞춰 분화구에 매복하였다면 예상보다 수월하게 궤멸시킬지도 모른다.
탐노! 여기다!
큰오름과 족은오름 사이로 진입하자 성주 어른이 외치며 손짓했다. 성주 어른은 내가 부탁한 대로 말을 준비해 놓았다.
나는 사병들에게 지시하여 서둘러 말을 옮겨 타고 곧장 족은 다랑쉬오름에 올라 숨을 골랐다.
족은오름 정상은 낮고 평평해서 사방 어디서든 훤히 보였다. 그래서 우리를 발견한 왜구는 추격을 멈추고 빤히 쳐다보았다.
왜국 장수의 눈이 이글거리며 불타올랐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왜구를 향한 나의 분노가, 우두머리를 잃고 쫓아온 왜구에 비할 바 없이 크다는 것을.
차쿠르 아저씨가 머릿속에서 속삭였다. 우두머리를 쳐라. 우두머리를 쳐야해!
나는 창을 치켜들고 오만하게 내려보았다. 이윽고 말을 끌고 터벅터벅 내려갔다.
적장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나는 온몸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겁쟁이가 아니라면, 나서라!
적장이 기다란 태도(太刀)를 빼 들었다. 저렇게 기다란 칼과 겨룬 경험은 없으나, 창은 칼보다 길다.
나는 힘껏 달렸다. 적장이 마주 달려온다. 그의 칼이 번뜩이며 솟구쳤다.
나는 그보다 빠르게 창을 찔러 넣었다.
승부는 찰나였다. 칼은 닿지 않았고, 창은 적장의 말을 찔렀다.
놀란 말이 앞발을 들며 이히힝 비명을 지르고, 적장은 땅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고통을 견디며 일어섰다. 하지만 나의 창은 간단히 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가자! 왜구를 쫓아내자!
창을 번쩍 들고 외쳤다. 왜구 기병 사이로 거세게 내달렸다. 백 기의 탐라 기병이 뒤를 따랐다.
왜구 기병은 큰오름과 족은오름 사이로 빠져나갔다. 우리를 피해 족은오름 정상을 차지하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이미 실패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큰다랑쉬 분화구에서 화살이 일제히 날았다. 그것은 족은오름을 오르는 왜구 기병의 뒤통수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었고, 왜구 기병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보았느냐! 이것이 초쿠투부카의 계책이다! 초 삼촌이 알려준 필승의 전략이란 말이다!
살아남은 왜구 기병은 허겁지겁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일백의 탐라기병과 함께 맹렬하게 추격하였다.
초 삼촌과 중산간을 뛰놀며 꼬리물기를 하던 때가 떠올랐다. 가슴 속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묘한 해방감이 일었다.
왜구를 쫓아 다시 광치기 해변에 이르렀다. 그들은 황급히 배에 오르고 있었다.
성주 어른이 내 어깨를 잡아 세웠다. 병사들이 지쳤다, 여기까지만 하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주 어른, 저는 지난 모든 일을 잊을 겁니다, 새로운 세상에 맞추어 살아갈 겁니다, 그러기 위해 한풀이를 해야겠습니다, 막지 마시오!
최영 장군은 삼촌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모조리 죽였다. 나도 그리할 것이다.
이윽고 소리쳤다.
“모조리 죽여라!”
모래사장은 배에 오르려는 왜구가 뒤엉켜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기마대를 이끌고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 절뚝거리는 왜구의 머리를 치고, 항복하는 왜구의 두 팔을 잘랐다.
모래가 빨갛게 물들고 비명이 파도를 덮었다.
나는 원(元)도 명(明)도 고려도 싫다. 탐라만호, 성주, 왕자, 목사 따위도 뭔지 모르겠다. 그냥, 죽이자. 죽이고 잊어버리자.
그렇게 시작된 살육의 현장에서 나는 반쯤 정신을 놓았던 것 같다. 나는 어느새 말에서 내려와 왜구들과 육박전을 치르고 있었다.
발이 푹푹 빠지고 널브러진 시체에 발에 걸렸다.
왜선이 코앞에 떠 있었다. 살아남은 왜구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첨벙첨벙 배로 향했다.
그들의 뒤통수에 화살이 날아가 꽂히고, 바다 표면엔 시체가 둥둥 떠다녔다.
고함과 비명이 귓가를 맴돈다. 바람이 땀으로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시원하게 스쳐 갔다.
나는 왜구를 쫓아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저항하는 왜구의 기다란 칼을 쳐내고 그의 허리춤을 잡아 돌렸다.
관 삼촌과 수없이 겨루며 익힌 씨름 기술이 마음대로 튀어나왔다.
달려드는 왜구의 품으로 파고든다. 양손으로 허벅지를 들어 안고 힘껏 들어 올려 자빠뜨렸다.
옆에서 칼이 날아들었다. 한발 물러나 피하고, 두발 다가가 허리춤을 잡고 앞뒤로 흔든다.
왜구는 파도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중심을 잃었다.
뒤에서도 칼이 날아들었다. 허리를 숙여 피하고 재빨리 뒤를 돌아 왜구의 칼 든 팔을 양손으로 붙잡아 당겼다. 끌려오는 상대를 다시 밀치며 넘어뜨리곤 칼을 휘둘러 마무리했다.
탐노! 피해라! 도망쳐! 성주 어른이 소리쳤다.
도망치라니, 무엇으로부터?
나는 지금 광치기 해변을 장악하고 있었다. 전장의 한가운데에 오직 나만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도망칠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었다.
별안간 이마를 찌르는 살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김중광이었다. 김중광 그자가, 각궁을 힘차게 당기고 있었다.
화살이 빠르게 다가온다. 피하려고 해도 넘실대는 파도가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김중광은 분명히 말했다. 낌새라도 보인다면 역모의 죄로 다스리겠다고.
나는 백 기의 탐라기병을 양성하고, 창날을 몰래 들여오고, 왜구 기병을 상대로 승전하였다.
목숨을 빼앗을 이유로 충분한가?
그런 것 같다. 김중광은 왜구보다 내가 더 두려웠나 보다.
내가 직접 육성한 탐라 기병을 이끌고 출정하자 그 창끝이 자신에게 향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대원(大元)의 핏줄? 카치의 전사? 대역죄인의 아들?
적어도 탐라의 군민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화살은 하나로 그치지 않고 연속으로 날아들었다. 마치 김중광의 의지를 담기라도 한 듯이 사방을 노리고 들어왔다.
피할 길이 없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고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