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자쿠구순(5)

by 상재

24.


속이 텅 빈 물소뿔과 달리, 녹각은 속이 꽉 차서 다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활 길이에 맞는 녹각을 고르고 칼로 엷게 잘라내어 다듬는 과정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녹각을 붙잡고 하루 종일 끙끙대고 있었다.


그때 무사 몇이 성큼 다가왔다. 처음부터 내게 시비를 걸다가 내가 영주와 친해지자 그걸 못하게 된 무사들이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아주 작정하고 온 듯하였다.


무사는 말했다. 네까짓 게 영주와 친구라고?


나는 어쩌라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예전에야 눈치 보느라 말을 조심했지만, 이젠 무서울 게 없었다. 영주의 친구가 되었으니까.


그런데 흥분할 거란 예상과 달리 무사들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너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고귀한 영주가 아무나하고 친구가 되면 곤란하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조정 관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친구 되기 시험이라니,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무사들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무시하려고 했지만, 무사들은 좀처럼 나를 붙잡고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쫓아낸다는 소리에, 너희가 이러는 걸 다케토모도 아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무사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계집애처럼 이르려고?”


슬슬 부아가 돋았다. 오기가 생겨 뭘 어쩌면 되는지 물었다.


무사는 활쏘기, 맨손 박투(搏鬪), 칼싸움, 세 가지 대련을 제시했다.


듣고 보니 오히려 좋았다. 아무리 봐도 차쿠르 아저씨나 음보 삼촌보다 잘 싸울 것처럼 보이는 무사는 없었다.


이번에는 시험 방식을 물었다. 하루 동안 세 가지 대련을 치르고 이기면 된다고 하였다.


준비하려고 이것저것 물었더니 핀잔이 돌아왔다. 그걸 알면 뭐 어쩌자는 것이냐며, 평소 실력으로 싸우라고 했다.


나는 지기 싫어서 호기롭게 응했다. 싸움은 당장 내일로 잡혔다.


어쨌든 준비 없이 가만있을 순 없었다. 새로 만든 각궁과 탐라에서부터 가져온 환도(環刀)를 정성 들여 닦았다.


하루 동안 세 번 겨룬다. 체력전이 될 것이다.


눈을 감고 싸움을 그려봤다.


왜구와는 탐라의 모래사장에서 신나게 겨뤄봤다. 긴 칼을 다루는 솜씨는 일품이었지만 활쏘기나 씨름은 별거 없었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이길 수 있다.


문제는 칼싸움인데, 왜국의 태도가 탐라의 환도보다 길다는 게 문제였다.


일반병사들이야 그럭저럭 상대했지만, 무사들은 그야말로 싸움 귀신이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투지가 대단했다.


칼 길이의 이점까지 있으니 마냥 쉽지만은 않게 생각되었다. 칼싸움을 궁리하며 날을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시험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마주했다. 무사들이 의기양양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시험인 활 대련은, 오십 보 거리의 표적을 백 발이나 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왜국의 무사는 열 명이 나서서 각각 열 발씩 쏜다고 하였다. 활쏘기로 체력을 빼놓을 계책이었다.


치졸한 수였기에 비아냥댔더니, 무사들은 오히려 비웃었다. 이 정도도 못해서야 영주의 친구 자격이 없다고 조롱했다.


대체 영주의 친구에게 무슨 자격이 필요하단 소린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기왕 시작한 바에야 콧대를 바짝 눌러주어야 했다.


활쏘기 시합이 시작되었다.


탐라에선 활을 겨룰 때 백 보를 기본으로 하였고, 석 삼촌과는 이백 보 쏘기를 겨루었었다.


오십 보 거리 표적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백 번이나 당겼더니 가슴이 뻐근했다.


나는 힘든 기색을 감추고 백 발을 모두 표적 가운데 꽂아 넣었다. 열 명의 무사는 각기 일고여덟 발을 맞추는 데 그쳤다.


그러자 왜국의 무사들이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어 맨손 박투가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도 어이가 없었다.


총 세 사람과 겨루어 이겨야 한다고 했다. 이젠 항의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어쨌든 이기면 그만이었다.


관 삼촌은 자기가 겪었던 싸움을 상세히 설명해 주곤 하였다. 나는 관 삼촌과 겨루며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전사들과 싸워 왔다.


전장에서는 창칼만으로 싸울 수 없었다.


전투를 치르다 보면 창을 놓치고 칼이 부러지기 일쑤였다. 때로는 적을 죽이기 위해 넘어뜨리고 밟아야 했다.


갑옷을 피해 단검을 찌르고 눈알을 뽑아야 했다. 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박투에 임했다.


첫 상대는 발에 걸려 넘어졌고, 두 번째 상대는 주먹을 휘두르다가 허리를 잡혀 뒤로 넘어갔다.


세 번째 상대는 제법 주먹질을 아는 자였지만, 나는 발로 허벅지를 밀어 차고 연이어 복부를 걷어찼다. 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다 헛구역질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왜국의 무사들은 거의 사색이 되어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 나를 보았다.


이제 마지막 칼싸움이 남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케토모에게 하소연 해볼까?


잠시 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멀리 낯익은 사내가 보였다.


다케토모였다. 그 옆에는 조 삼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이쪽을 바라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이 시험은 무사들의 개인적인 시비가 아니었다.


왜국의 무사들은 나를 두고 진짜 시험을 치르고 있었고, 아마도 다케토모가 묵인한 것이었다.


불공평한 시험 방식도 어쩌면 미리 상의한 것일지 모른다.


싸움에 나선 무사는 자못 비장했다.


그러잖아도 기다란 태도보다 한 뼘은 더 긴 대태도를 정성 들여 쥐었다. 기세가 매섭게 다가왔다.


나는 팔꿈치를 뻗어 한 손으로 환도를 비스듬히 잡았다. 무사가 기합을 치며 천둥처럼 다가오자, 그의 대태도가 산을 가를 듯 내려왔다.


저걸 한 손으로 받으면 틀림없이 밀려난다는 생각에, 환도를 옆으로 휘둘러 비껴쳤다.


한 손 검의 장점은 왼손이 자유롭다는 점이다. 나는 연이어 다가오는 무사와의 거리를 재며 틈을 노렸다.


무사는 내가 무언가를 노리고 있음을 눈치챈 듯, 좀처럼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승부를 가르려면 결국 칼을 맞대는 수밖에 없었고, 그 순간은 곧 찾아왔다.


재차 칼이 날아들자,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반걸음을 다가가며 칼을 맞대었다.


무사가 예상하던 거리보다 칼을 맞대는 거리가 짧아졌기에, 힘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다.


무사는 급히 몸을 숙이며 몸무게로 나를 밀려고 시도했다.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한 발을 빼며 몸을 틀었다. 무사가 중심을 살짝 잃고 앞으로 쏠렸다.


이때다!


나는 성큼 다가가 무사의 한 팔을 양손으로 꽉 잡고 품으로 당겼다. 이제 무사는 기다란 태도의 장점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무사의 올바른 대처는 곧장 무기를 버리고 씨름으로 돌입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끝까지 칼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잡은 팔을 당기며 슬쩍 발을 걸었다. 무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발라당 자빠졌다.


나는 재빨리 무사의 위에 올라타 양팔을 무릎으로 눌렀다.


무사는 심하게 몸부림쳤지만 어림도 없다.


나는 몇 차례 주먹을 휘둘러 무사의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멀리 다케토모의 입이 놀람으로 벌어지고, 삼촌의 얼굴엔 희색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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