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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 piece Feb 22. 2022

거의 행복해하는 얼굴

나무 식탁 위에는 남편이 출근하며 까먹고 간 것으로 추정되는 한라봉 껍질

어젯밤 가득 따라놓고 결국  마시지 못한  사이 얼음이 녹아 투명한  띠가 생겨버린 연갈색 콜라  , 일회용 마스크  옆으로 치실과 로션, 보드라운 갈색 귀마개와 물병, 읽다  서너 권의 책들이 어지럽게 뭉쳐있다.


못 본 척 눈길을 거두곤 방향을 틀어 냉장고 문을 열고 식혜를 꺼내 든다.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눈에 보이는 호박 한 거실이 마음에 들어 이 집을 선택했다. 나무 식탁은 거실 한가운데 있다. 인도네시아산 고재 티크로 만들어진 담백한 식탁은 거진 10년이 되었고 여전히 아름다워 내 작은 심미안의 증표가 되어준다.


외출 후 그 우직한 기물이 멀찌감치 덩그러니 보일때면 어느 때고 잘 돌아왔구나  하고 마음이 놓였다. 단 식탁 위가 깨끗해야한다.


정리하면 돼지. 서 있는 여기부터 언제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주섬 주섬 흔적을 지우곤 유리컵을 요리조리 흔들어 바닥에 가라앉은 식혜 밥알을 한번에 톡 털어 넣는다.


오래된 연못처럼 고요하게 낡은 이 집을 갖게 된 건 정말이지 커다란 행운이야.

당신과 나 우리 둘은 운이 좋은 편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어, 짧게 두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신에게 목례를 한다.


밤사이 통증이 사그라들었나 했는데 팔목은 더욱 힘차게 욱신거리고, 몸은 낮게 깔아진다.

무리해서 외출할 수도 있지만 미열도 있고 오늘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교회 행사를 앞두고 일손이 부족한 어머니를 도우러 갔다가 요령 없이 일한 탓에 삼각인대가 파열됐다.

그해 여름 수련원에서 거기 있던 누구도 내게 감자 바구니를 한 번에 옮기라 다그치지 않았건만 인정받고 싶어 미련을 떤 것이다. 그 마음이 행동이 부끄러울 것은 아닌데 그날을 생각하면 매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해줄 어른들이라는 것을 그때는 차마 알 수 없었고 믿지도 못했겠지


타월상점이 바빠 한참만에 쉰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박수근 화백 전시가 열린다기에 며칠 전 급하게 예매해두었는데 아쉽게 됐다. 전시를 관람하고 서촌으로 넘어가 좋아하는 비건 카레를 한 그릇 하고 덴마크에서 건너온 차가운 허브티를 마시며 느긋하게 걸을 참이었는데 생각할 수 록 아쉽다.

구움 과자도 다음에 귀여운 강아지 보리도 다음에 팔목 통증이 수월한 다음날에 하자 했다.


휘파람 불듯 가볍게 포기하고는 햇살이 넉넉한 거실 바닥에 나른하게 누워 박연준 시인의 산문을 읽는다.

때마침 올라온 글의 제목이 멈춤이다 "멈춤은 자신과 상황을 통제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다. 멈추는 자는 자신을 세우고 싶어 한다. 더 나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세우는 일, 나는 모든 멈춤의 순간이 좋다.

멈춤에는 기대와 고요, 긴장과 유연함이 고루 들어있다."


오늘치의 즐거움을 챙기지 못한 것 같아 끈적이는 마음을 알고 토닥인다.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기어코 나섰다면 내일도 모레도 수월하지 않았으리라 대신 집 앞 산책을 선택했다. 겨울 사이 얼굴이 좀 투실투실해진 것 같아, 마스크를 쓰며 혼자 웃었다


운동화 끈을 동여매고 햇살 사이로 파고든다 두 발 밑에 닿는 땅의 느낌이 좋다.

삐뚜름이 기운 오늘의 나를 세워 천천히 걷는다. 그래 나는 멀리 떠나는 것 못지않게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좋아하지.


프랑수아즈 사강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지금 ‘거의 행복해하는 얼굴'이지 않을까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 있나. 이렇게 살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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