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서울의 한 아파트. 널찍한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도시의 불빛이 은은한 조명 아래 넓은 거실을 비추었다. 샤워 후 촉촉한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며 나온 지훈의 얼굴에는 여자친구 채린과의 달콤했던 데이트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사랑스러운 채린의 미소, 재치 넘치는 농담, 따뜻한 손길...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소파에 털썩 앉는 순간, 날카로운 핸드폰 벨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여보세요?"
지훈의 목소리에는 아직 즐거운 떨림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행복을 산산조각 냈다.
"지훈 씨 되시죠? 강남 경찰서입니다. 혹시 이채린 씨의 남자친구분 되시나요?"
지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네, 제가 채린이 남자친구입니다. 무슨 일이죠?"
"안타깝지만... 이채린 씨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지훈의 손에서 맥주캔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액체가 카펫 위로 퍼져나갔지만, 지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눈은 커다랗게 뜨여 있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핸드폰 소리가 마치 그의 심장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채... 채린이가...?"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갈라졌다. 눈앞이 흐려지고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릿속은 온통 채린과의 행복했던 기억들로 가득 찼다. 따스한 햇살 아래 손을 잡고 걷던 공원, 달콤한 디저트를 나눠 먹던 카페, 밤하늘 아래 나누었던 사랑 고백...
"아니야... 이건 꿈일 거야..."
지훈은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곧 흐르는 눈물은 그가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려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훈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병원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채린의 가족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채린의 어머니는 딸을 잃은 슬픔에 넋이 나간 듯했고, 아버지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지훈을 보자 채린의 어머니는 흐느끼며 그의 품에 안겨 왔다.
”지훈아... 채린이... 우리 채린이 어떡하니...“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채린의 어머니를 품에 안고 함께 울 뿐이었다. 채린의 차가운 시신을 확인하고 그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슬픔은 곧 분노로 변했다. 뺑소니 범은 아직 잡히지 않았고, 채린은 억울하게 죽어야 했다.
"반드시 범인을 찾아 복수할 거야."
지훈은 이를 악물고 복수를 다짐했다.
며칠 후, 지훈은 경찰서에서 사고 현장 CCTV 영상을 확인하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그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채린이 다니던 회사의 CEO, 쉐도우였다. 쉐도우는 싸늘한 표정으로 채린을 향해 차를 돌진시킨 후 멈칫하는 듯했지만, 이내 액셀을 밟아 채린을 치고 급히 현장을 벗어났다.
“그런데... 범인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수사하고는 있습니다만...”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지훈은 경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찰서를 빠져나와 쉐도우를 찾아갔지만, 그는 이미 종적을 감춘 뒤였다. 그때, 지훈의 눈에 쉐도우의 컴퓨터에 떠 있는 알 수 없는 화면이 들어왔다. ‘잠부딥바’라는 문구와 함께 녹색의 숫자들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잠부딥바...?"
지훈은 낯선 단어를 중얼거리며 쉐도우의 컴퓨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순간, 주변이 온통 흰 빛으로 반짝이며 소용돌이쳤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는 낯선 공간에 있었다. 푸른 하늘 대신 형형색색의 오로라가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고, 주변에는 기괴한 모습의 생명체들이 돌아다니는 기묘한 세계.
"여긴 어디지...?"
지훈이 혼란스러워하는 순간, 그의 앞에 홀로그램처럼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훈 씨. 저는 제로라고 합니다. 이곳 잠부딥바의 안내자이죠."
"제로? 잠부딥바? 여기가 어디죠?"
지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은 잠부딥바, 인간의 의식이 업로드된 가상현실 세계입니다. 지구 전체가 이곳으로 옮겨졌죠. 그리고 당신은 이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특별한 존재라니요?"
"당신에게는 잠부딥바의 에너지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이 힘을 사용하여 잠부딥바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물리치고, 이 세계를 구해야 합니다."
지훈은 제로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결의에 찬 눈빛으로 변했다.
"쉐도우... 그놈이 여기 있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쉐도우는 이곳 잠부딥바에 숨어 현실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당신은 잠부딥바를 구하고, 채린 씨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지훈은 잠부딥바의 규칙과 시스템을 설명하는 제로의 말을 들으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채린, 내가 반드시 널 위한 복수를 할 거야. 이 낯선 세계에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