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선이는 오늘 밤도 화가 난다

경선이의 육아 분노 일지

by Anne s Library

Episode 8. 분노의 이사

경선이는 살면서 많은 이사경험을 했다. 홀로 자취를 하며, 이곳저곳으로 이나라 저 나라로 잦은 이동에 익숙하다. 하지만, 아기를 데리고 이사를 하는 경험은 그녀가 살면서 해온 이사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를 위해선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정리하는 게 우선이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아이가 있는 상황에선 정리가 불가능했다. 평소에 방금 치워 놓은 공간도 한 1분 여가 지나지 않아, 마치 정리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은 초토화의 마법을 부리는 아기 앞에서 정리는 무의미해 보였다. 분명 홀로 조용히 책을 보는 것 같아, 살짝 안방으로 들어와 옷들을 꺼낸 경선인 입지 않는 옷들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때,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치우려 했지만, 대다수의 아기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생각보다 빠르고 민첩하다. 어느새 옷 더미에 몸을 던지며, 접어 놓은 옷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다. 예상한 일이지만 마음이 급한 경선이는 그 모습에 이내 분노한다. 하지만, 그 옷들을 입어 보겠다고 목이고 발에 걸쳐보는 아기의 모습에 이내 귀여움에 사로잡혀 열심히 동영상을 찍고 있다. 그렇게 옷정리는 물거품이 되고, 아기가 자고 있는 틈을 공략하기로 한다. 이번 이사를 준비하는 동안 경선이를 힘들게 한 것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이제는 필요치 않은 아기물건이나 옷들을 정리하는 동안 그녀는 아기의 성장을 새삼 느끼게 되었고, 평소 미련 없이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폐기하는 그녀였으나, 그녀의 아기 물건은 쉽게 쓰레기봉투에 담아 지질 않았다. 아주 작은 양말 하나까지도 그리움에 사무치고 소중했다. 이 정도면 그녀의 아기를 위한 박물관을 하나 만들 수 있는 만큼 그동안 쌓인 물건들이 많았다. 분명 버려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상자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다. 어렵사리 아기물건 정리를 마치며, 경선이는 그녀의 물건은 크게 정리할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럴 만큼의 “그녀의 것” 들이 적었다. 적은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녀의 공간, 그녀의 시간, 그녀의 마음 까지도. 순간 경선이의 모든 것들이 소멸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 자신이 원치 않는 이사를 당한 것 같았다. 정리는 분명 바람직한 일이고, 비움의 아름다움도 인지하고 있는 경선이지만, 점차 희미해져 가는 “이경선” 자신에게 분노가 일었다. 그녀가 너무도 필요이상으로 정리되고 비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내 그녀는 분노할 시간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사하는 과정은 정리에서 정리로 이어졌다.

모두 가 잠든 새벽, 경선이는 새 집을 바라보며, 한 귀퉁이를 발견한다. 내일 그녀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꽃을 사고 화병도 사고, 그 조금의 공간을 경선이만의 장소로, 존재로 채우려 한다.

이제 경선이는 조금씩 자신을 채우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