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향일암 여행기
애초에는 오동도를 먼저 가 볼 생각이었다.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 어르신께서 뜬금없이 향일암을 먼저 가 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하셨고, 애초 별 계획 없이 쏘다니는 나는 바로 향일암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향일암으로 가는 버스는 20분 후에나 도착할 예정이다. 버스 정류장 근처는 평범한 주택가였고 야트막한 슬라브 집들이 어린 시절 우리 동네를 떠올리게 한다. 여수임을 상기시켜 주는 동백꽃이 늦게까지 남아서 피어 있다.
이 곳이 여수임을 상징하는 표식들은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표식은 바로 갓김치. 알싸하면서 쌉싸름한 돌산 갓김치의 맛은 여수를 대표하는 맛이다. 그 옆에 있는 '담뱃잎 가게'는 좀 생소하다. 찾아보니 완성품 담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을 위해 '담뱃잎'만 팔고 담배를 말고 필터를 붙이고 하는 작업은 손님이 해야 하는 방식이라고. 서울에도 있다던데 여수에서 훨씬 자주 마주치는 듯하다.
향일암까지 버스로 대략 40분 정도 걸렸다. 바다를 끼고 산길을 오르내리며 달리는 버스는 그 자체로 훌륭한 관광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관광객들에게 선뜻 말을 걸어 안내를 해 주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인심도 풋풋하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들을 지나쳐 가는 버스에서는 이웃들끼리의 만남도 자주 일어난다. 아침부터 술에 취한 옆집 할아버지를 향한 수더분한 아낙네의 나무람도 있고, 대처에서 성공한 아들과 딸자식 자랑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경쟁도 있다. 다양한 여수 사람들의 짤막짤막한 드라마를 곁눈으로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4월의 신록임에도 남녘의 나무들은 생각보다 훨씬 짙어있다. 동동주 한 잔 하고 올라가라는 노변 식당 아주머니들의 살가운 호객행위를 모두 물리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향일암을 향한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려니 제법 숨이 차 온다. 평소에 운동이라고는 거들떠보지 않고 살았던 탓이다. 가뿐 숨을 들키지 않으려고 굳이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 찍는 척 쉬어간다.
숨이 가빠올수록 바다색은 선명해지고 포구는 점점 더 멀어진다. 푸른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또 다른 푸르름이 상쾌하다. 하늘과 나무의 푸르름을 섞으면 저 바다의 푸르름이 만들어질까?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은 하늘과 섞여 구분이 어렵다.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향일암이다.
향일암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2009년 12월 화재로 대웅전 등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지금은 화재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창한 날씨 덕에 향일암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는 참으로 아름답다. 바다 너머로 보이는 다도해의 실루엣은 육지임에도 하늘과 바다와 닮은 색을 띠고 있다. 여기에 절에서 꾸며 놓은 형형색색의 종이 등이 화려함을 더한다. 관광객들이 입고 온 원색의 등산복조차도 화려한 색감 속에 스며들어 버린다.
크지 않은 암자의 모든 공간은 바다를 향해 열려있다. 세속의 어지러운 것들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보이는 것은 푸른 바다와 하늘뿐, 속세를 떠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련하기에 이 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듯하다. 그야말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공간이다. 남해의 끝자락,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 앞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욕심의 덧없음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은 굳이 불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 싶다. 한가로이 쉬며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신 부처님의 여유로움에 감사드리며 말이다.
향일암을 내려오다 보니 아침식사가 부실했는지 속이 허전해진다. 마침 길옆 식당에서 풍겨오는 전 부치는 기름 냄새가 허기를 부추긴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의 가게에 자리를 잡고 막걸리와 홍합전을 시켰다. 혼자 다니는 여행길에 눈치 볼 필요 없으니 좋다. 두어 잔만 마시고 일어나려던 동동주는 어느새 한 주전자를 다 비워버렸고, 홍합전과 함께 먹은 갓김치에 반해 집으로 한 박스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으니... 바다는 색뿐만 아니라 맛까지 증폭시키는 기운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