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별이 가득, 땅에는 메밀꽃이 가득
응답하라 시절, 홍은동 단독주택에 살았었다. 겨울이면 멀리서 들려오던 "찹쌀떡, 메밀묵" 소리가 이따금씩 생각난다. 구성진 목소리도 있었고 어설픈 목소리도 있었다. 어설프던 목소리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제법 구성지게 울려 퍼진다. 부모님을 졸라 찹쌀떡 한 봉지를 사 오면서 메밀묵은 왜 파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별 맛도 없고 밍밍한 메밀묵을 말이지. 긴긴 겨울밤 출출할 때 메밀묵무침은 좋은 술안주가 된다는 걸 어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됐다. 아무튼 메밀은 나에게는 겨울을 상징하는 일종의 아이콘이었다.
동호회 월례 정기 모임 자리였다. 늘 그렇듯이 살아가는 이야기, 전시회 다녀온 이야기, 새로 나온 카메라 이야기 등으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누군가로부터 봉평 메밀꽃밭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이 한창일 텐데..."
누구라고 할 것 없이
"그럼 가야지."
그리하여 다음날 밤 9시에 일산 대화역에 모여 봉평으로 향하게 된다. 대략 밤 10시 반 정도 도착하니 관광객은 이미 다들 떠나고 미쳐 끄지 않은 조명등만 메밀꽃으로 가득한 메밀밭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온 밭 가득 팝콘을 뿌려 놓은 것 같은 메밀밭은 차라리 비현실적이었다.
급격하게 떨어지는 기온으로 인해 메밀꽃들은 밤이슬을 머금고 있고,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메밀꽃은 하얗게 빛나고 있다. 밤하늘을 환히 비추는 달빛 덕분인지 투명할 정도로 흰 색을 띠고 있다. 매크로 렌즈를 두고 온 게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20mm 광각렌즈로도 충분했다.
가을밤을 얕보고 얇게 입어 오돌오돌 떨기는 했지만 아무도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없다. 또 다른 메밀밭을 찾아보기로 했다. 중간중간 촬영 포인트도 있고, 산책길이 마련되어 있는 이 곳은 너무 인위적이긴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산자락을 돌아가다 보니 야트막한 야산을 등에 지고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메밀밭이 펼쳐진다. 하늘에도 별이 가득이다. 셔터 누르는 손가락이 바빠진다.
그렇게 2014년 9월 하루는 메밀꽃과 별이 가득했던 밤으로 기억되고 있다. 저 꽃들로 인해 수확된 메밀이 이번 겨울에도 누군가의 헛헛한 술상에 벗이 되어 주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