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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지 Aug 14. 2021

<메시아><홈랜드> 지워진 아이

여성 CIA 요원의 임신과 출산

※ 스포일러 경고

<메시아> <홈랜드>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FBI 말고도 DEA(마약단속국)이나 CIA(중앙정보국)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나 TV 시리즈가 많다. 여기서 한국의 국정원과 비슷한 CIA 이야기를 하자. 공식적인 설명을 참고하면, CIA는 국가가 중요한 안보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대통령을 비롯해 관련 정책 입안자들에게 국제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정부 기관이다. FBI도 미국 정보 공동체의 일원인데, FBI가 미국 시민과 집단의 정보를 수집한다면 CIA는 외국과 그 시민에 관한 정보만 수집하며 FBI에게는 법 집행 권한이 있고 CIA는 없다. CIA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엔 대개 FBI가 깍두기로 등장하곤 하는데 이 때문이다. 테러 같은 국제 사회 범죄에 미국이 개입하는 순간, CIA는 첩보원으로서 해외 정보를 확보하고 FBI는 이와 연결된 자국 문제를 경찰과 비슷하게 처리한다. FBI가 권한은 더 커 보여도 활동 범위는 미국에 한정되고, CIA는 전 세계에서 뛴다. 


2019년 CIA 고용 통계에 따르면 남성 직원은 61%, 여성은 39%였다. 그러나 각 성별이 어디서 어떻게 일하는지, 우리가 극에서 자주 접하는 여성 스파이 비율이 실제로 어떠한지를 상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CIA가 채용하는 인력은 훈련된 방첩 요원 말고도 통신 전문가와 지도 제작자부터 자동차 정비사와 임상 심리학자까지 100종이 넘는다. 게다가 CIA는 국가 안보를 다루는 만큼 내부 정보 노출에 매우 신중한 기관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세계를 조금은 안다. 상당한 지능과 전투력을 갖춘 특출한 개인이 전 세계를 무대로 비밀리에 활약하면서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것 정도를 안다. 그건 <본 아이덴티티>(2002)로 시작하는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을 키우고 망가트린 비인간적인 임무이기도 하면서, CIA는 아니지만 <007> 시리즈(소설 1953~, 영화 1962~)의 제임스 본드와 <미션 임파서블>(1996~)의 이단 헌트 같은 남자 첩보원 캐릭터가 끈질기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성은 <미녀 삼총사> 시리즈(2000~) 속 ‘찰리의 천사들’처럼 ‘섹시’하다. 배우 고유의 분위기와 커리어에 묻어가는 것도 방법인데, <툼 레이더>(2001)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2005) <원티드>(2008) 등 화려한 액션물에서 쌓은 전사 이미지를 이어 <솔트>(2010)에서 CIA 요원을 연기한 앤젤리나 졸리가 대표적이다. <스파이>(2015)는 이런 도식을 뒤집기 위해 유머를 택한다. CIA 요원 수잔 쿠퍼(멜리사 맥카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다. 여성 스파이는 업무 능력 이상으로 외적인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스파이에겐 성별 불문하고 공통점이 있다. 연애를 잘하든 못하든 미혼인 경우가 많고, 결혼했거나 이혼했다면 아이가 없다. 이건 개인사보다 일터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한 사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러닝 타임 120분 미만짜리 영화의 구조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시리즈물로 이동하면 이들의 숨 막히는 업무 말고도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상세하게 그려줄 시간이 생긴다.



<메시아>(2020)의 CIA 요원 에바(미셸 모너핸)의 이야기는 산부인과에서 시작한다. 시술을 마친 뒤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의료진에게 해봐서 다 안다며 짜증을 내고, 문자로 예후를 묻는 아버지도 귀찮아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배에 자가 주사를 놓는데, 배란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에바는 난임이다. 먼저 떠난 배우자가 남기고 간 냉동 정자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총 네 차례 시도했다. 에바의 본거지는 CIA 헤드쿼터인 워싱턴 DC인데, 전문 영역은 아랍권 정보 관리라 전에 없던 비폭력적인 영적 지도자(메시아)가 나타났음을 알고 그 위험성을 파악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출장을 간다. 메시아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접경지에서 갑자기 미국 텍사스로 이동하자 에바는 FBI와 공조해 그를 주시한다. <메시아>는 과장된 육탄전을 벌이는 첩보물이 아니다. 미국이 위협으로 인지하고 관리해야 할 혼란의 양상이 과거에는 조직적인 테러에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은은한 의식 지배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작품이다. 말하자면 작품 속 메시아는 빈 라덴이 아니라 간디 혹은 예수 같은 선지자이고, 비폭력적인 그를 상대하는 CIA의 업무 위험도는 제이슨 본이나 제임스 본드보다는 낮다. 에바는 총 한 번 드는 일 없이 발로 뛰어 현지 정보만 수집하고 상부에 보고하는 실제적인 CIA 요원이다.


출장지에서 하혈을 한 에바는 지역 병원에서 유산 진단을 받는다. 그러다 주사 키트를 쓰레기통에 던진다. 결혼반지를 뺄까 말까 망설인다. 한동안은 탄산수만 마셨지만 술을 찾고, 정서적으로 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랑 잔다. 그렇게 임신을 포기했지만, 사실 성공해도 고려할 게 많다. 공동 양육자로 볼 만한 사람은 아이를 기다리긴 해도 돌보기는 어려울 아픈 아버지뿐이라 무사히 출산을 마친다 해도 워킹맘으로서 향후 출장 업무에 상당한 지장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이런 의문에 답하지 않는다. 에바의 임신 시도는 떠난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슬픔을 대변할 뿐 출산을 마쳤을 때 당면하게 될 할 현실적인 과제에 대해서는 침묵한다는 것이다. <메시아>는 에바의 삶보다 아랍권과 미국을 오가는 메시아의 정체에 더 큰 비중을 실은 작품이다. 그 이야기가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즉 에바가 대륙을 오가며 메시아의 정체를 밝히는 데 장벽이 없으려면 그 임신은 실패해야만 한다. CIA 요원의 임신이라는 어려운 주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출산과 양육 과정을 생략하고 요원의 사랑과 결혼만을 묘사하는 첩보물의 관습에서 사실상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배경이 비슷한 <홈랜드>(2011~)는 여성 CIA 요원의 사랑, 임신 및 출산과 육아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을 만든다. 시즌8까지 이어진 긴 이야기를 따라갔다면 주인공 캐리 메시선(클레어 데인즈)의 뛰어난 직감과 일 처리 능력,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병력 말고도 복잡한 연애사를 알게 된다. 캐리는 폭탄 조끼를 입고 미대통령에 접근한 테러리스트를 사랑했다. 이 사랑은 인질범에게 정서적 애착을 느끼는 스톡홀름 신드롬과 비슷하다. 위험인물과 신뢰를 형성하기 위해 다가가 애정을 연기하다가 체포하기도 전에 진심이 된 것이다. 그러다가 아이까지 생겼다. 당시 캐리는 미혼이었고, 상대는 이혼하지 않은 기혼자였으며 결국 아이를 보지 못한 채 떠났다. 


작품은 임신 초기까진 캐리한테 일을 많이 주다가 말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건너뛰지만, 출산 후에 마주하는 모순적인 감정은 상세하게 다룬다. 민간인 사살을 포함한 현지 포격 작전을 지휘하는 파키스탄 CIA 지부장 캐리는 이 비인도적인 당일 업무를 끝내고 아이와 영상 통화하는 시간만을 기다리지만, 정작 파견 근무를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육아를 불편해하다가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다는 주변 사람들의 염려를 뒤로하고 도피하듯 고된 출장 업무를 자처한다. 한참 시간이 흘러서야 이유가 설명되는데, 아이의 머리색이 죽은 아빠와 같아 그에 대한 슬픔을 환기했기 때문이다(이런 부연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것 같다. 아이에 대한 양육자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이 아닌 다른 복잡한 감정을 나누는 기회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캐리는 마치 <다이하드> 시리즈의 존 매클레인 같다. 일을 대단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단히 잘한다. 그 일은 대체로 급박하고 위험하며 세계 전역에서 이루어진다. 캐리는 <메시아>의 에바처럼 정보 수집도 잘하지만 에바가 보여주지 않은 호신술에 능하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아이 프래니는 아직 어리다. <홈랜드>는 성인의 안전하지 않은 출장 업무와 돌봄이 필요한 아이라는 상충되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지 않고 믿을 만한 부양육자로 해결한다. 캐리에겐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잘 이루었으며 보조 양육자로서 충실하기까지 한 인자한 언니가 있다. 정작 아이가 태어났을 땐 별 도움이 안 됐지만, 딸의 임신을 축복하며 직접 키워주겠다고 장담했던 캐리의 친아버지도 있었다. 처음에야 태어난 아이한테서 혼란을 느꼈지만 몇 년 지나 아이에게 진정한 사랑과 책임감을 표현하기 시작했을 땐 캐리에게 다정한 애인이 생겨 양육 부담을 나눌 수 있게 됐다. 애인과 관계가 소원해지고 긴급 작전에 투입됐을 땐 아이를 전용기에 태워 미국 언니 집으로 보낼 수 있는 재력가 상급자가 곁에 있었다. 그렇게 챙겨줄 사람이 곁에 있어도 캐리가 하는 일의 특성상 아이가 상처 받거나 방치될 때가 많다. 애인과 전처 사이의 아이까지도 캐리 때문에 끔찍한 위기에 처한 때가 있었다. 이럴 때마다 작품은 주변 인물들의 대사를 빌려 이래선 안 된다고 캐리에게 충고하거나 등을 돌린다. 아이가 등장한 이상 양육자의 책임 문제를 가볍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 문제는 법원으로 간다. 양육권 이양 소송이다. 참다못한 캐리의 언니가 내린 결정이고 이 결정에 힘을 실어준 사람은 캐리의 형부다. 결국 언니 가족이 승소하는데, 이로써 주양육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까운 주변 사람도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그래도 캐리에겐 아이와 대면할 법적 권리가 있지만, <홈랜드>는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 캐리의 운명을 영영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으로 그린다. 아이의 사진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두고 언젠가 아이가 읽게 될 기록을 남겨두는 것으로 사랑만큼은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지만, 결국 양육을 포기하고 일을 선택한 것이다. 캐리는 언제 어디서나 목숨을 걸고 일한다. 그러다 아이가 생기면 작전 수행에 매우 심각한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요원에게 가정을 이룰 기회는 줘도 임신과 출산은 생략하는 것이 첩보물의 암묵적인 규칙인데, <홈랜드>는 이 도식을 부수되 다분히 현실적인 판단을 한다. 매번 출장지에서 위태로운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독박 육아는 고된 일이기에 부양육자가 필요하지만(반드시 배우자일 필요도 없다), 그것이 주양육자가 책임을 방기하는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판사의 목소리로 전한다.



<홈랜드>에는 캐리와 비슷한 삶의 복잡한 순간을 겪었을 남자 캐릭터가 있다. 캐리가 목숨을 걸고 정보를 캐러 다닐 때 역시 목숨을 걸고 출장 암살 임무를 맡아왔던 피터 퀸이다. 그는 이 험한 일과 양육자 역할을 병행할 수 없다는 걸 진작 깨닫고 배우자와 아이를 떠났다. 퀸의 아이는 캐리의 아이와 다르게 사진에서만 존재하고, 캐리가 프래니를 둘러싼 사랑과 희생 사이에서 방황할 때 아이에 대한 퀸의 감정은 애틋한 그리움으로만 묘사되며 그보다 격한 감정은 임무 수행 중에 무고한 아이를 죽였을 때만 발생한다. 캐리가 주인공이고 퀸은 그보다 비중이 크지 않아서 필연적으로 생긴 차이일 수도 있지만, 만약 <홈랜드>의 주인공이 퀸이라는 남자 캐릭터였다면 과연 캐리처럼 양육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건 모든 양육자의 책임이어야 마땅하지만 어떤 배경에서든 출산 당사자인 여성에게 보다 민감한 의무로 전가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 작품에서 아이가 자라는 환경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도 느껴진다. 캐리는 파키스탄에서 일할 때 아이를 미국에 뒀다. 독일과 미국에서 일할 땐 같이 살았고, 캐리의 상급자가 터키로 가면 아이랑 살 수 있지 않느냐 묻는 대사가 있었다. 북미와 유럽을 벗어난 분쟁 국가는 정말로 아이에게 나쁠까. 계획 없이 아이를 위험한 환경에 두는 것이 올바를 수는 없지만 어떤 세계에서나 아이는 존재하고 성장한다. 모순적이게도 그런 아이들은 첩보물과 수사물 속 행정 요원이 그토록 지키려 애쓰는 이 사회의 약자들이다. 그러다 결국 극의 편의를 위해 지우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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