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독립운동과 건국운동
1.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정리
독립운동 (1910-1919)
1910년, 일본 제국의 조선 강제 병합은 조선 민중에게 깊은 충격과 상실감을 안겼다. 이로 인해 조선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국권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들은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다지게 되었으며, 이 시기에 일어난 독립운동은 일본의 억압적 통치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일어나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족 해방 운동이 펼쳐졌다. 이 운동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일본 제국에 맞서 싸우며, 한국 민족의 자결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저항은 외국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 사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는 후속 독립운동에 큰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 외에도 의병 운동은 조선의 전통적인 무장 저항 방식으로,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이 일본 군대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일본의 군사적 압박에 저항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려 했고, 그들의 희생은 한국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독립에 대한 열망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된다.
건국운동 (1919-1945)
1919년 3·1 운동의 결과로, 세계 각국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국제적 지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이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한 조직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시기는 일본의 식민 통치가 계속되었지만, 독립을 넘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한 기틀이 마련된 시기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은 이 시기의 중요한 사건으로, 1919년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심 기구로 자리 잡았다. 임시정부는 민주적이고 법치주의에 기반한 국가 체제를 구상하며,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괄하여 한국의 독립과 국가 수립을 위한 통합된 노력을 기울였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 이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헌법 제정과 국가 기관 설치 등의 활동에 매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나중에 대한민국의 정식 정부 수립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독립운동가들은 국권 회복을 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헌신하였다. 그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필요한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협력하며,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바탕으로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민의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헌법 제정과 정치적 기초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이는 미래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건국운동의 마무리 (1945-1948)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일본 제국은 패망하게 되었고, 한국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은 극심한 혼란과 갈등의 시기를 겪었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남한과 북한 간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각 지역에서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한 경쟁이 벌어졌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건국운동가들은 통합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모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이는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모든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으로, 한국이 독립을 넘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이 시기의 건국운동가들은 헌법 제정과 국가 기관 설립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으며, 그들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시하며 한국 사회의 정치적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다.
이 과정에서 많은 건국영웅들이 새로운 정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협력하였으며, 이들의 노력은 대한민국이 이후 마주할 도전들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데 헌신하였다.
결론적으로,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은 서로 다른 시기와 목표를 지니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영웅들이 남긴 유산은 현재와 미래의 한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단순히 과거의 영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을 이끌어 온 중요한 주체들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인은 자주성과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은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결과물로, 이는 대한민국이 세워지기까지의 고난과 희생의 역사적 증거이다. 이 과정에서 건국영웅들이 보여준 희망과 용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민들에게 깊은 감동과 영감을 준다. 그들의 정신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며, 국가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2. 건국운동의 요소
건국운동의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요소들을 고려해야 한다:
정치적 독립과 주권 확립
건국운동의 핵심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외세 지배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이 포함된다. 조선 말기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은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근대적 국가 체제 수립
건국운동은 단순히 독립을 쟁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후 근대적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헌법 제정, 행정과 사법 제도의 근대화, 민주적 정치 체제의 확립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체제 구축은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사회적 개혁과 변혁
건국운동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과 변혁을 필요로 한다. 이는 구체제의 낡은 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갑신정변과 같은 급진적 개혁 시도는 구체제의 전통적 요소들(예: 신분제, 봉건적 통치 구조 등)을 철폐하고,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로 전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경제적 독립과 자립 기반 마련
건국운동은 경제적 자립을 통해 외부의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체적인 경제적 기반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 토지 개혁, 산업화, 자원 개발 등의 경제적 정책과 계획이 포함된다. 경제적 독립은 자주적인 외교와 국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문화적 정체성 확립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이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다. 건국운동의 성공은 종종 국민적 정체성과 일체감을 강화하는 데 달려 있으며, 민족주의와 자주적 문화 인식의 확산을 통해 가능하다.
3. 건국운동의 역사적 맥락과 사례
건국운동은 대개 제국주의, 식민주의, 외세의 압박 등과 같은 외부의 억압적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부터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에 이르는 과정을 들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의 개혁 시도
1894년 갑오개혁과 1896년 독립협회의 활동은 근대적 개혁을 통한 국가 건설을 시도한 예로, 구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꾀하려 했다. 개혁의 시도는 그 당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던 민중들의 다양한 노력이었고 독립운동과 건국운동 측면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일제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0년 한일합병 이후부터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은 단순한 독립 쟁취를 넘어 새로운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건국운동으로 발전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이후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지향하며 건국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45년 광복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1945년 광복 이후, 남북한은 각각 다른 정치적 체제 하에 건국운동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제헌 헌법을 바탕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는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건국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
왜 건국운동을 재조명해야 하는가?
오늘날 건국운동을 재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현재와 미래의 국가 정체성, 자주성, 민주주의 가치를 되새기는 중요한 작업이다. 건국운동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당성과 근대적 국가로서의 자긍심을 확립하는 근거가 되며, 오늘날 사회적, 정치적 도전에 맞서기 위한 통찰과 지혜를 제공한다.
건국운동은 한 나라의 독립적 정체성과 근대적 국가 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는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을 포함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자주적이고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건국운동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상과 인물, 사건을 통해 발전해 왔으며, 이는 오늘날 국가 정체성 확립과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쉽게 말해서 모든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의 건국의 영우들이며 그들은 건국운동가들이었다.
4. 독립운동과 건국운동의 차이점
독립운동을 건국운동과 같은 측면에서 보는 시각은 임시정부의 행위를 주축으로 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일반 조선국적을 가졌던 사람들이 했던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국권회복의 외침이나 투쟁이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국가 시스템을 바라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그것은 그동안 계속 말해오던 일반적 독립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은 그래서 친일파라는 반역의 무리를 말할 수 있다. 독립운동의 영역에는 동학투쟁과 3.1 운동이 속한다. 동학은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신 종교의 무리들이 기존 정치 개혁과 외세에 저항한 운동이었고 그 저항은 1894년 우금치에서 토벌되며 갑오개혁의 수순으로 이어지게 된다. 3.1 운동은 조선 한반도의 많은 민중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조선이 독립된 나라를 선언한 운동이었지만 33인의 민족 종교 대표들은 민중들의 많은 체포와 죽음을 만든 큰 손실을 입은 독립운동이었다. 1919년의 3.1 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이 로어 졌는데 이것은 3.1 운동이 조직적으로 거행되기 어려웠던 그 시절 상황을 고려한 독립운동가들의 운동적 전략 지혜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3.1 운동은 임시정부의 정신적 주춧돌이 되었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새로운 각성의 기회로 이어진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나라를 잃고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들은 조선에서 겪던 생활보다 계속적으로 더 윤택한 삶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던 것은 국권 상실의 아픔과는 아이러니한 일들이었다.
결국 독립운동은 3.1 운동 이후 거의 모두 임시정부로 모이게 되고 이후의 투재의 양상은 일본과 무장투쟁을 통한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최후의 목표를 삼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국노 친일파를 다루어 보겠다. 한일병합의 을사늑약, 정미 7 조약, 한일 신협약 등 역사 속에서 일본과의 협약 테이블에 나와 도장을 찍고 자신의 이름을 올린 자들 중 단연코 이완용은 계속적으로 중복되는 인물이다.
이완용은 양자였다. 그리고 장자였지만 재산을 물려받지 못한 비운의 장자였다. 그는 대원군의 애신이었고 고종에게도 인정받는 능력 있고 똑똑한 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개혁 의지는 고종과 대원군의 외면을 당했고 결국 배신을 당했다. 그때 그의 생각은 청나라를 돕는 우둔한 자가 되기보다는 근대 개혁국가인 일본과 손을 잡는 편이 조선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지고 회담의 장소로 갔던 것이다. 그에게는 다시 조선이 국권을 회복한다는 생각 따윈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오로지 전근대적이고 무능하고 가난하고 암울했던 조선을 바꾸는 길은 일본과 손을 잡은 일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일본과 손을 잡고 일본의 합법적 수단에 협조한 이들은 독립운동 측면에서 반역이고 친일파와 매국노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건국운동 측면으로 보면 19세기 이후 국가는 국가의 4요소로 알 수 있듯이 주권 즉, 외교능력을 가지고 있어 안 했기에 그 당시 일본과 손을 잡고자 했던 행위는 발전적 측면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행위가 건국운동적 측면의 대등한 위치의 우군이 아니고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모든 조선의 국권을 빼앗기는 협약에 도장을 찍었다는 내용적 측면이 결국 그들이 친일 매국노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3족을 멸하고 9족을 멸해야 하는 반역행위였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 임의적으로 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일본으로부터 인정받는 협조자들이었지만 고종은 본인 스스로 그 자리에 나갈 수 없었기에 입헌군주제라는 자신이 만든 정치시스템을 빌미로 행정부의 대표들을 협약 장소로 가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이에 이미 친일파였던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5적은 종로의 장소로 가서 날인을 했던 것이다.
이 행위는 조선을 완전하게 망하게 했고 대한제국 백성들은 이제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백성들은 일본군이 인천 제물포로 행군을 하며 들어올 때 저항할 의지와 힘은 전혀 없었다. 그만큼 대다수 민중은 가난과 배고픈 생활로 고통의 나날이었다.
다시 조선으로 회복하자는 민중적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가 없어져서 반상의 도리가 사라진 나라,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되고 그런 나라에 일자리가 생겨 월급을 받게 되고 내 아이는 학교를 갈 수 있게 된 대다수 민중은 그냥 일상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권 회복운동인 독립운동은 비조직적이고 비폭력적인 특징을 지닌 반면 건국운동은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을 띠게 된다.
그것은 사실상 태극기 들고 주장을 하던 모양에서 총을 들고 일본의 이해관계에 직접 부딪히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은 3.1 운동을 계기로 거의 소멸되어 간 반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건국운동은 이제 시작이 된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독립운동은 대한민국의 시작이었고 이념전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후 세계는 약육강식의 구도가 냉전구도의 편가름 형식으로 바뀌었고 한반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람들도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민주주의 세력과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도 조선 한반도를 다시 조선 대한제국으로 국권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이 아니었고 대한민국 또는 새로운 사회주의공화국을 만들고자 하는 그들만의 희망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은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건국 중심이었고 그들은 건국운동을 한 것이었다는 바뀔 수 없는 진실을 말하며 현재 대한민국 정치권을 휩쓸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문제를 더 이상은 눈뜨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독립운동은 1984년부터 1919년까지 1차적으로 조선의 국권회복을 향한 운동이었다면 1919년 3.1 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난 이후에는 모두 새로운 나라를 향한 건국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