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장의 딸, 지혜
덕수는 아직 씻지도 않은 채 문을 열었는데, 바깥에는 아까 보았던 선장의 딸, 지혜가 서 있었다.
그녀의 밝은 미소가 덕수의 마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빠가 데려오래요?" 그녀가 말했다.
"아... 제가 잠시 졸아서 아직 씻지를 못했습니다. 금방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덕수가 답했다.
지혜는 아무 관심 없는 듯 "네"라고 하면서 뒤돌아갔지만, 덕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여운을 느꼈다. 샤워를 하는 동안 지혜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보내준 미소와 눈빛은 덕수의 마음속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머리를 흔들며 너 미쳤니…" 덕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참 어이없는 놈이네.. 임마, 니가 지금 뭔 생각 하는 거야… 하… 참.
" 비슷한 생각에 혼자 중얼거리며도 웃음이 나왔다.
바다에서의 고된 일상과 달리, 그녀의 존재는 덕수에게 한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그는 씻고 나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옷을 입고 거울을 보니,
청바지에 셔츠를 입은 자신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구리빛으로 변해 있었다.
덕수는 갑자기 자신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미 냄새에 중독된 덕수는 자신에게 나는 비린내를 맡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가지고 있던 향수를 흠뻑 뿌리곤 선장의 집으로 향했다.
덕수는 너스레를 떨며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기수가 놀라면서 덕수를 놀렸다.
"이게 뭔 냄새여? 어서 똥 묻혀왔남!" 덕수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냄새 많이 나나요?" 베트남 선원들은 킥킥대며 웃었고, 선장은 그런 덕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지혜가 여러 가지 음식을 내어왔다. 주방에서는 선장의 아내가 연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덕수는 주방으로 갔다. "제가 뭐 도와드릴게 없을까요?" 선장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덕수씨는 음식도 잘하신다면서? 오늘은 맛은 없지만 그냥 앉아서 맛있게 먹어요.
" 덕수는 선장의 아내의 미소를 보면서 엄마의 미소를 느꼈다.
"네..." 덕수가 자리로 돌아오자 선장이 "덕수, 한잔 받게나!"라며 술을 권했다.
덕수는 배에서 하는 행동과는 전혀 다르게 무릎을 꿇고 술을 받았다.
선장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을 터뜨렸다.
기수는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자꾸 놀리기 시작했고, 베트남 선원들은 킥킥대며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겨서 지혜도 주방에서 엄마와 함께 계속 웃고 있었다.
갑자기 기수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선장님! 지가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느니,
지가 지혜씨를 사랑하고 있는디..." 선장은 덕수를 슬쩍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진즉 알고 있었어... 어째 우리 지혜한테 장가 올겨?
" 기수는 다리를 꼬면서 "자기도 무릎을 꿇고 술 한 잔 받아야 쓰겄는디유."라고 말했다.
선장은 "고건 안되제."라며 웃었다.
기수는 절망적으로 "왜 지는 안되는디유!!
왜 지는 안되는 디유!!! 지혜야! 사랑햐.....
" 덕수는 기수의 행동에 당황하며 "저 담배 좀 피고 오겄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덕수가 바깥으로 나가자 방 안에서는 박장대소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덕수는 부끄러웠다. 자신의 마음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기수형이 좋아하는 사람을 자신이 탐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다.
잠시 후 담배를 다 피우고 다 포기한 마음으로 한숨을 쉬며 들어갔다.
선장이 말했다. "자, 덕수 한 잔 더 받게나." "네. 선장님!" 덕수는 여전히 예의를 차리고 술을 받았다.
술 한 잔을 주욱 들이킨 선장이 덕수에게 물었다.
"자네, 우리 지혜 처음 봤는가?" 덕수는 당황한 눈빛으로 "네"라고 답했다.
"어째 맘에 드는가?" 덕수는 세상 놀란 눈빛으로
"아...아...아니요. 기수 형님이 맘에 있으시니 제가 어떻게..."라고 말했다.
기수가 순간 박장대소하며 "에이, 내가 오늘 맘 정리했다.
그냥 동상 가져라!"라고 외쳤다.
덕수는 "아... 모든 게 장난이었다는 생각에 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술을 마셨다.
선장이 딸 지혜를 불렀다.
"지혜야! 이리 좀 오이라!" "인사해라! 여긴 우리 배에서 일하는 덕수여.
근디 자네 성이 뭔가?" "전 덕수입니다." 그려! 너 이름이 덕수고 성은? 저느 덕수입니다.
아니! 이눔아, 성이 뭐냐고?
기수가 나섰다. 성님! 성이 저씨여!
아...하하하
"여긴 박지혜여! 난 거그까지 했으니 나중에 잘 해보소. 하하하하"
지혜는 "우리 아까 봤잖아요!"라며 부끄럽게 웃으면서 주방으로 돌아갔다.
폭풍 속에서의 고생은 한 순간에 사라지듯,
덕수는 여인의 향기에 완전히 녹아들어갔고
그 밤의 술자리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