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 도시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고, 텅 비어 있었다. 차가운 공기와 도로를 따라 달려가는 기호의 택시 안. 엔진 소리와 가벼운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기호는 조용히,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틀어놓은 플레이리스트에 흐르는 곡은 그가 즐겨 연주하는 곡들. 한곡, 두곡, 세곡, 이어지는 트랙을 따라,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음악은 그에게 있어 다가가고 싶은 감정이었고,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꾸만 나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수현은 언제나 그랬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노선으로 택시를 타고, 같은 캔맥주를 손에 쥐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차에 오르곤 했다. 그가 택시를 탈 때마다 느껴지는 공허함.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손에 쥔 맥주 한 캔은 그에게 유일한 위로였다. 매일매일, 그가 하는 일은 다를 수 없었다. 늘 반복되는 하루의 끝에서, 수현은 늘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잊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마시는 맥주가 주는 잠깐의 자유와 여유가 무엇보다 값지다.
"이태원이요." 수현이 말하자 기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현은 맥주를 캔에서 따며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택시의 헤드라이트가 도로를 비추고, 그가 앉은자리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기호는 룸미러를 통해 수현을 살짝 훔쳐보았다. 왜냐면 택시 안에서의 맥주를 마시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지만 기호는 그냥 개의치 않았다. 수현은 개념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호는 무언가 음악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네요." 기호는 그냥 평범하게 말을 건넸다. 그에게는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얘기할 것도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피곤하지만 기어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뭐, 고생이야 늘 있죠. 근데 오늘은 꽤 괜찮은 하루였어요. 이 맥주 한 캔이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딱이네요."
그는 맥주를 들고는 유유히 한 모금 마시며, 그동안의 고단함을 잊으려 애쓰는 듯했다. 기호는 여전히 음악을 틀고, 택시를 운전했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음악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기호는 음악을 변경하며 차 안을 채웠다. 그가 좋아하는 트랙이 흘러나왔다. 기타와 드럼, 그리고 묵직한 베이스. 곡이 바뀔 때마다 기호는 무의식적으로 손끝으로 기타를 튕기며 흥얼거렸다. 그는 음악을 느끼며 살고 있었고, 그러한 순간은 그에게 유일한 존재감이 되어줬다.
수현은 창밖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음악에 집중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가 흥얼거리며, 잠시 고개를 까딱이더니, 비트에 맞춰 손을 살짝 흔들었다. 마치 손끝에서 베이스라인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음악은 그의 몸속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기호는 순간, 수현이 베이스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보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머릿속에서 기타 애드리브가 떠오르며, 그는 유심히 수현의 손끝을 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두 사람이 하나가 된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현은 이따금씩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기호는 그 리듬에 맞춰 자신도 모르게 기타 선율을 떠올리며, 순간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기호는 운전을 하면서도 모든 생각은 음악에만 집중하면서 수현의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택시는 이태원에 가까워졌고, 음악에 서로 긴장감이 조금씩 풀어졌다고 기호는 생각했다. '이 사람,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아니, 그 이상인 것 같다.'
순간 차 안의 공기에서 어떤 신선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음악으로만 이어졌고, 그 에너지는 두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발산되었다.
기호는 잠시 수현을 보고 여전히 운전을 하며 다시 음악에 집중했다. 그의 손가락은 자동으로 기타의 프렛을 따라가며 흥얼거렸다. 수현은 창밖을 응시한 채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가 음악에 빠져드는 모습은 기호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기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 사람, 언젠가는 내 밴드에 꼭 초대해야겠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그를 초대할 수 있을까? 기호는 그런 생각에 잠시 빠졌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인가 떠올랐다. 수현의 리듬감이, 그의 음악적 반응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곡들은 무엇일까? 그는 어느새 수현에게 말하려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택시가 이태원에 도착했다. 거리의 불빛이 비추고, 차가 멈춰 섰다. 수현은 마지막 맥주를 마시고, 차 문을 열며 기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음악 덕분에 하루가 훨씬 나았네요."
기호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어느새 조수석 케비넷에서 명함을 꺼내 들었다. 조심스럽게 그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저기, 한번 봐보세요. 이거 제 명함인데… 사실 요즘 밴드를 준비 중이에요. 혹시 관심 있으시면…"
수현은 그 명함을 받아 들고, 잠시 그 위에 적힌 이름과 번호를 읽었다.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어쩔 수 없이 비쳤다.
"밴드요? 제게요? 제게 말이에요?." 수현은 놀라는 눈빛으로 명함을 받아 쥐었다.
기호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까 음악을 흉내 내시던 모습 보고, 혹시 감각이 있으신 분일까 싶어서요. 나중에 같이 음악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수현은 명함을 들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음악 들으시는 게 예사롭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그럼 연락 주세요. 꼭 기회가 되면, 함께 해요."
수현은 택시에서 내려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기호는 한참 지켜본 후 다시 차를 돌렸다. 그 순간, 기호의 마음속에는 이미 수현과 함께할 새로운 음악의 시작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호는 그 음악을 통해 또 다른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기호는 택시를 몰며 조용히 속으로 말했다.
"이게 시작일까? 아니면 끝일까?"
기호는 창을 열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다시 하이웨이 스타를 틀고 강변북로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