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민의 하루는 언제나 카페의 문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따뜻한 커피 향기가 매장 안에 퍼졌지만, 그에게는 평범한 직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바리스타로 일하며 주문을 받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다.
"아메리카노 하나요. 샷 추가."
"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의 손은 루틴처럼 움직였다.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며 그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흡수했다. 기계가 내뿜는 증기 소리, 얼음을 담는 소리, 유리컵이 부딪히는 소리가 그에게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치익… 팡! 쟁그랑…"
그는 이런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리듬을 멜로디로 전환했다. 재민의 머릿속에서는 그 순간도 음악이었다. 얼음이 컵 안에서 부딪치는 소리는 베이스 라인으로, 스팀의 날카로운 소리는 기타 리프가 되었다.
"음, 이거 괜찮은데?" 그는 커피를 준비하면서도 상상 속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작업대 옆에는 항상 종이와 펜이 있었고, 틈틈이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어 두었다.
재민이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어주고 있을 때도 그의 발은 리듬을 타고 있었다. 카페에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조차 그의 음악적 사고를 방해할 수 없었다. 그것마저도 그가 상상하는 음악 속에 흡수되었다.
"재민씨가 만든 커피는 항상 맛있어요."
단골손님이 건넨 말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좋은 음악처럼 흘러가시길 바랄게요."
퇴근 후, 재민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음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의 방은 작았지만, 그곳은 그의 스튜디오이자 무대였다. 벽에는 오래된 기타, 그의 첫 연습용 앰프, 그리고 밴드 포스터들이 있었다.
"오늘은 이 리프를 완성해야겠어."
그는 침대 옆에 놓인 기타를 집어 들고 천천히 줄을 튕기며 음을 맞췄다. 하루 종일 떠올랐던 멜로디를 기억해 내며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기타 줄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고, 방 안에는 점점 선율이 채워졌다. 때로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가상의 드럼과 베이스 소리를 추가하며 전체 밴드의 사운드를 상상했다.
그날 밤, 나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배달 중에 좋은 멜로디가 떠올랐어. 너한테 보낼게!"
나연이 보낸 음성 메시지 속에는 험한 도로 위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재민은 메시지를 재생하며 웃었다.
"이게 진짜 그녀 답지."
그는 즉시 나연의 멜로디 위에 기타 연주를 더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수정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완성된 곡을 나연에게 다시 보냈고, 몇 분 후 그녀의 반응이 왔다.
"이거 대박인데? 우리 진짜 밴드 만들어야겠다."
재민은 단순히 연주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이 가진 감정을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연이 "이 부분은 뭐가 부족해..."라고 느끼는 순간,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카페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 지하철 역의 웅성거림, 심지어는 비 오는 날 창문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까지도 재민에게는 음악의 일부였다. 그는 그것들을 리듬과 멜로디로 변환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민이 그의 작은 방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을 때, 나연은 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흥얼거렸고, 기호는 택시 안에서 상상의 밴드와 함께 애드리브를 하고 있었다. 수현은 청소를 마치고 술 한 잔을 곁들인 새벽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들이 아직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들 각각의 음악적 열망은 서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재민의 기타 선율은 언젠가 기호의 택시 안에서 흘러나올 것이고, 나연의 목소리는 수현의 귀를 통해 그의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그들의 운명은 아직 얽히지 않았지만, 재민은 이미 그 운명의 연결점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이 결국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묶어줄 운명이었다.
재민이 나연을 만난 건 3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주 여행을 떠난 재민은 협재 해수욕장 한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던 나연을 보았고 한참을 나연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
몇 곡의 노래가 끝났을 때 주변에는 이미 듣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녀가 노래 부르기를 그만두자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여행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재민은 나연에게 다가가 반말로 말했다.
너 노래 잘한다! 오늘 뭐 하니?
나연은 바로 답했다. 나 연애 관심 없다. 꼬마야!
나연은 웃으며 떠나려 했고 재민은 다가서며 또 말했다.
나도 여자로는 니 타입 아니고 그냥 니 노래가 탐나서 그러니 소주 한 잔 하며 음악 얘기나 하자!
나연은 그런 재민이 싫지 않았고 지금까지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