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BAND PEACE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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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수현의 고민

by 이문웅 Jan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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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수현은 가방 속을 뒤적거리다 기호가 준 명함을 꺼내 들었다. 작은 종이 한 장.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는 단순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복잡한 감정의 파문을 일으켰다. 그저 택시 안에서의 짧은 대화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일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흔들 줄은 몰랐다.


수현은 명함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


‘내가 정말 이 사람과 음악을 할 수 있을까?’

‘대체 뭐 때문에 내 마음이 이렇게 동요하는 거지?’


마음이 복잡할수록 손은 익숙한 곳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를 꺼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맥주가 목구멍을 지나자마자, 묘한 쌉싸름함과 함께 그날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음악 좋아하시나 봐요?”

“네.”

“혹시 음악 하세요?”

“락커세요?”


기호와 나눈 짧은 대화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 대화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느꼈던 기대감, 설렘.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자 그 모든 것이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릴까...”


그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식탁 위에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맥주를 다 마신 뒤,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침대로 향했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며칠간, 수현의 일상은 변한 게 없었다. 이른 새벽에 일을 나가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고,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루틴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의 머릿속에는 기호의 명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그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음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만약 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수현은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서툴렀고, 특히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일은 더더욱 낯설었다. 음악이라는 단어조차 그에게는 과거의 추억 속에서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그는 오랜만에 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기타를 꺼냈다. 먼지가 쌓여 있던 케이스를 열자, 낡은 베이스 기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끝으로 줄을 튕기자 낮고 거친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음이... 너무 틀어졌네.”


수현은 베이스 기타 줄을 하나씩 조율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래된 기타를 손에 들고 있자니, 과거의 자신이 떠올랐다.


“내가 이걸 잡고 무대에 섰던 적도 있었는데...”


그 시절엔 음악이 그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생계를 위해 음악을 포기했고, 그 선택이 옳았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기호의 명함 한 장이 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수현은 베이스 기타를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불이 꺼진 방 안에서도 명함은 그를 괴롭혔다.



며칠이 지나도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출근길에 명함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빼내곤 했다. 심지어 일을 하다가도 종종 머릿속에서 기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은 그냥 하는 게 아니에요. 진짜로 하고 싶어야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정말 하고 싶으면, 후회는 없을 거예요.”


수현은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정말 음악을 하고 싶을까? 아니면 그냥 이 사람의 열정이 부러운 걸까?’


퇴근 후, 그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깊이 생각했다. 맥주 캔을 따고, 음악을 틀고, 베이스 기타를 다시 잡았다. 손가락 끝으로 느껴지는 낡은 기타 줄의 감촉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내가 정말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결국, 고민 끝에 수현은 결심했다.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명함을 집어 들었다.


“일단 전화를 걸어보자. 그게 뭐가 어렵다고 이렇게 고민했을까...”


휴대폰 화면에 적힌 숫자를 하나씩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그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여보세요?”


기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수현은 당황했지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기호 씨. 저, 며칠 전에 택시에서 뵀던 수현이에요.”


기호는 반갑게 대답했다.


“아, 수현 씨! 전화를 주실 줄은 몰랐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수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며칠 동안 고민했어요. 제가 이걸 정말 해도 되는지, 잘할 수 있을지... 그런데 그날 얘기를 나누고 나서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음악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니까, 예전에 잊고 살았던 무언가가 떠오르더라고요.”


기호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나서 웃으며 말했다.


“고민하셨다니 오히려 기뻐요. 진지하게 생각하셨다는 거잖아요.”


수현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기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이번 주 주말에 한번 만날까요? 서로 얘기도 나누고 계획도 세워보면 좋겠네요.”


수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좋아요. 제가 이태원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만나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죠.”


전화를 끊고 나서 수현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이게 시작이겠지...”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음표들이 울리기 시작했다.


운명은 그렇게, 작은 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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